민주노동당의 강령 분석

시대정신 25호(2004년 여름)

사회디자인연구소 승인 2021.06.27 20:16 의견 0

특집 - 민주노동당의 강령 분석 시대정신25호(여름) / 시대정신(2004년)

출처: 시대정신 블로거 https://blog.naver.com/ngmin/220957872612

김대호(노사관계 컨설턴트)

박정희, 전두환의 폭압과 반역자들,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해온 뒤틀린 한국 현대사에 대해 울분을 터뜨려 본 386/486치고 과거 운동권의 지향을 변함없이 견지하고 있는 민노당 인사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당리당략, 지역주의, 보스정치, 토호정치, 불법정치자금 등으로 얼룩진 한국 정치판에서 민노당은 어찌보면 군계일학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진성당원에 입각한 수준 높은 당내 민주주의, 社會的 약자에 대한 뜨거운 애정, 부의 재분배에 대한 높은 관심, 당 운영 과정의 높은 투명성, 열띤 토론 문화 등등 민노당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신선하기조차 하다.


그런데 민노당의 구호나 주장들 중에 왠지 ‘철지난’느낌을 주는 것들이 많아서 올 2월 초에 비로소 그 강령을 꼼꼼히 살펴본 적이 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되는 여론조사 결과와 ‘1인 2표제’를 감안했을 때 4월 총선에서 민노당의 원내진입은 명약관화해 보였다. 물론 10석이라는 대박을 터뜨릴 것으로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필자가 볼 때 민노당은 몇석이든 원내 진입에 성공만 하면 ‘날개 단 호랑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 단독으로도 정부와 맞짱을 떠온 민주노총, 전농같은 강력한 대중단체와 민노당은 긴밀히 결합되어있고 수만 명의 열성적인 진성당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만간 날개를 달 호랑이로 될 민노당에 대해 이번에는 제대로 알고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진보정당의 강령은 달콤하고 멋진 말들을 대충 쓸어모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 양심과 지혜의 총화이자 온갖 공약과 정책의 모태가 아니던가? 그래서 꼼꼼히 읽어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강령을 읽고 나서 필자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금할 수 없었다. 강령에는 1980년대 중반 전두환의 폭압과 자본의 전제적 지배가 횡행하고,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권에 대한 정보가 극도로 제한된 시절에 형성된 정서와 사고가 거의 그대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민노당이 의회에 진입한 이상 개량화, 현실화 되리라 생각한다. 강령과 정책도 환골탈태하리라 기대한다. 그래서 민노당 강령과 그 사고방식의 시대착오성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일찍이 민노당의 강령에 적나라하게 표현된 정서와 사고방식이 산업 현장(대우자동차)에서 발휘하는 파괴력을 보아왔기에 마냥 낙관적으로 볼 수가 없었다. 지난 2000~2002년 대우차 처리를 둘러싼 엄청나게 소모적인 갈등, 은행 대형화(합병) 관련 갈등, 최근 한-칠레 FTA를 둘러싼 난항, 한국의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인 자동차 산업의 노사관계의 후진성과 중국·일본 업체의 협공 등을 지켜보니, 민노당 의원 10명과 민주노총,전농 등이 연계하여 그 강령을 치열하게 실천한다면 비틀거리는 한국 경제·사회를 넘어뜨리는 ‘작은 돌부리’ 역할은 충분히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되면 우리 후손들이 지금 중국인들이 그러하듯이, 허드렛 일자리하나 잡으려고 목숨을 걸고 고무보트로 서해를 건너 중국에 밀입국을 시도하는 등의 방식으로 전세계를 유랑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민노당 간부, 열성 지지자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지인들과 얼굴을 붉힐 수 있는 이 글을 쓰는 것이다.

X

X



1. 시대착오적인 강령


1) 외세를 물리치고,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평등과 해방세상으로


민노당 강령은 전문과 정치, 경제, 통일, 외교, 과학기술 등 16개 항목의 소주제로 나뉘어져 서술되어 있다. 먼저 민노당 강령의 기초가 되는 현실인식을 살펴보자.


“…… 미국을 정점으로 한 외세는 한반도를 분할하고 남북간에 전쟁을 부추켜 민족상잔의 참극을 야기시켰으며, 남북 모두에게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민중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민주와 자유를 빼앗아 갔다.
…… 매판적인 개발독재는 이제 외환·금융파탄으로 이어지고 이로부터 불거진 한국경제의 위기는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와 정치 권력은 이 위기의 본질은 외면한 채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더욱 가증스럽게 민중을 착취하고 있다.”


민노당은 ‘우리가 만들 세상’이라는 소제목 아래 당의 지향을 이렇게 집약적으로 표현하였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신자유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 투쟁해 나간다.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하고,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한다. (중략)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삶에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는 공공의 목적에 따라 생산되도록 한다. 지난날 국가사회주의 사회의 형식적 국유화의 한계를 거울 삼아 시장적 요소를 적절히 통제 활용하는 가운데, 노동자를 비롯한 생산 주체들이 생산수단을 민주적으로 점유하고 계획, 생산, 분배, 유통에 참여하도록 하여 경제의 효율성과 안정성, 공공성을 기한다. (중략)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 인류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민노당은 오늘날 민족과 민중이 당하는 고통을 자주적 민족통일국가를 좌절시킨 분단의 역사와 만물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외세, 곧 미국의 지배·간섭을 물리치고 반민중적인 정치 권력을 몰아내고,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자’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요컨대 미국의 지배·간섭 극복과 신자유주의로 현상화된 자본주의 체제 극복이 민노당의 궁극적 지향이자 강령의 날줄과 씨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 극복


민노당 통일분야 강령에는 남한과 북한에 대한 민노당 인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 (중략) 냉전의 양극체제 아래서는 아무리 남과 북이 자주적인 통일의 길로 나아가려 해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거센 힘에 부딪혀 통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반통일적인 외세를 민족의 의지와 역량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다.
(중략) 첫째, 궁극적인 통일체제는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 극복되면서 민중의 권익과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여야 한다.


둘째, 남한 내 통일기반을 확고하게 조성한다. (중략) 이는 분단·냉전체제의 내적 청산을 요구한다. 곧,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 등 냉전제도, 북한 낙인론과 같은 냉전의식, 북한을 적대화하는 냉전문화를 청산할 것이다. (중략) 경제적으로는 IMF 관리체제 이후 심화된 종속적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통일 배제적 경제구조를 전면 수정하여 (중략)
넷째, 한반도 냉전 구조를 청산하고 동북아안보협력체제를 구축한다. (중략) 우리는 남북한과 미국 3자 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변국 교차승인을 완결짓고, 주한 미군을 단기적으로는 감군 및 후방 배치하여 공격형보다는 방어형 등으로 개편하고, 장기적으로는 완전히 철수시키는 정책을 시행할 것이다.”


통일을 위해서 북한에 대해서는 경직성(국가사회주의의 오류) 시정을 주문하는 반면, 남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냉전제도, 냉전의식, 냉전문화, 신자유주의 등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시정 요구 사항은 남한과 비교할 때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강령의 자구로만 본다면 민노당의 북한 인식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경직성)를 시정하여 좀 유연하면 괜찮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이 민노당의 강령적 목표인 ‘미국의 지배·간섭과 자본주의 체제 극복’을 기본적으로 이루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노회찬 등 민노당 주요 인사들은 북한체제의 다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회찬은 신동아 2004년 6월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경제문제가 너무 심각해 기왕의 정책으로는 회복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북한이 어려운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미국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 살고 있더군요.”


그러나 북한의 경직성과 경제적 낙후성을 노회찬 등 일부 지도자들이 인정한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지독한 인권탄압, 수령독재, 언론통제를 일삼고,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 지극히 불투명한 데다가 변덕스럽고, 1인 수령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극도의 체제위기의식에 입각해서 핵무장으로 치닫는 북한에 대한 상당한 신뢰(이는 국방과 외교 강령에서 선명히 드러난다)는 미국에 대한 지독한 불신과 선명히 대비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3) 소유의 사회화와 사회적 조절을 우위에 둠으로써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한다


민노당의 통일, 외교, 국방 강령 자체는 대단히 위험스럽긴 하지만 의석수도 태부족이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서 실질적인 파괴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제, 교육, 보건의료, 사회복지, 농어민, 노동 관련 정책은 다르다. 이 분야는 의석의 96%를 가지고 있는 보수정당과의 표대결을 필요로 하지 않고, 민노당이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농민단체나 노동·사회 단체를 통해 ‘현장’에서 직접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노당적 사고의 실질적인 파괴력은 경제, 사회분야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민노당의 파괴력은 자본주의나 시장경제 자체에 대한 반감을 배경에 깔고, 현재 경제사회정책의 기조를 신자유주의로 보고 이를 타파 하려하는 데 있다.


강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경제체제를 지향한다. 이것은 사회적 소유를 바탕으로 하여 시장을 활용하는 경제체제이다. …… 민주적 경제체제는 소유의 사회화와 사회적 조절을 다양한 소유와 시장적 조절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한다.”


민노당은 자본주의적 경제모순을 해결하고 민주적 경제체제를 구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해결 과제를 명문화하고 있다.
첫째, 총수 일족의 지분을 공적 기금을 활용해 강제로 유상 환수하는 방법으로 재벌을 해체하고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한다. 특히 재벌 지배 대기업 가운데 공공성이 높은 부문인 통신, 운수, 병원, 학교 등은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으로 전환한다.
둘째, 사회적 조절을 우위에 두고 시장을 활용한다. 이를 위해 공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각종 금융기관을 재벌과 외국자본이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고, 공적 소유와 경영을 기본으로 하되, 경제정책위원회가 통제하는 민주적인 금융감독기구의 감독을 받도록 한다.
셋째, 국내기업에 대한 외국 자본의 소유 경영 지배는 국민경제의 중핵이 아닌 부분에서 일부만 허용하고, 잉여를 유출하지 못하도록 경영 내용을 감독하는 등 자주적이고 평등한 대외경제관계를 확립한다.


민노당이 지향하는 경제체제는 ‘사회적 소유를 바탕으로 하여 시장을 활용하는 경제체제’이며 ‘소유의 사회화와 사회적 조절을 다양한 소유와 시장적 조절보다 우위에 두는 체제’이다. 민노당은 그 어떤 시장경제에도 반드시 필요하고, 그 어떤 보수정당도 동의하기 마련인 ‘통상적인 국가의 계획이나 社會的 조절’을 강조하는 수준이 아니다. 또한 민노당의 재벌정책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나 소유 분산’이 아니다. 그것은 ‘강제로 유상 환수하여 재벌을 해체하고, 해당 기업의 노동자를 비롯해 다수 국민들이 소유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번 총선 공약에 나왔듯이, 노동자의 경영 참가폭을 확대하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외국 자본의 소유 경영 지배는 국민경제의 중핵이 아닌 부분에서 일부만 허용하고, 잉여를 유출하지 못하도록 경영 내용에 대해서 감독한다’는 민노당의 정책도 전 세계가 투자유치 경쟁을 벌이면서 온갖 투자 유인책을 쓰는 이 시대에는 여간 특이한 정책이 아니다. 민노당의 강령과 정책이 실제 집행된다면, 아마 한국은 지구상에서 해외자본을 가장 강력하게 통제하는 나라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지향을 가진 민노당이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득세하는 것만으로도 해외투자자들은 한국 투자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외국인 투자가들이 총선 직후 민노당을 방문하여 이것저것 물어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민노당이 가장 강점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노동 분야 강령에서도 반자본주의적 색채는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최소한의 문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생활 임금을 지급하고 …… 자유로운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 행동의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한다. ……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수행하는 노동의 성격에 따라서만 차이가 나도록 하고, 산업 유형이나 기업 규모, 기업의 이윤율 등에 좌우되지 않도록 한다.

……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노동자를 지배하는 노동 배제적 경영 방식은 착취 관계와 함께 종식되며, 노동자와 경영자가 동반자로서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는 공동 결정제를 실시하되, 노동자와 그 대표자가 모든 권한과 책임을 맡는 자주 관리를 지향한다.”


완전 고용 보장, 단체행동의 완전한 자유, 기업의 이윤율에 좌우되지 않는 임금 수준 보장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그런데 민노당의 지향은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이 어떤 발상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한참 전에 잊혀진 사회주의 체제 선전 문구를 떠올려보라!


노동자와 그 대표자가 모든 권한과 책임을 맡는 자주 관리를 지향한다(단순히 노동자가 경영자와 동반자로서 경영에 참여하는 수준이 아니다)는 대목을 보면 민노당의 지향이 무엇인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결국 민노당의 지향은 민노당 우파 성향 인사들이 자주 얘기하고, 한겨레신문 등이 그러려니 하는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구 소련이나 현재의 북한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주 관대하게 보아주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전략을 추구하던 1950년대 유럽 공산당, 사회당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해 민노당 인사들은 ‘원래 사회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식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려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경제, 사회 강령과 정책에 짙게 배여있는 반시장, 반개방, 반민영화 정책·공약 등을 보면 민노당이 가고자 하는 길이 결코 새로운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역사는 공적소유 및 계획(지령) 우위 경제는 필연적으로 유일사상-일당독재를 부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일성, 김정일, 폴포트, 스탈린이 원래 심성이 나빠서 독재자가 된 것이 아니다. 가치의 생산과 분배의 상당부분의 공공성을 체현한다고 자칭하는 수령과 중앙계획기관이 지령으로 수행하려하고, 사적 소유를 공적 소유로 급진적으로 바꾸려하고, 계급적 적대감에 입각해서 무자비한 계급투쟁을 고창하면 잔혹한 숙청과 독재를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김일성, 김정일, 폴포트, 스탈린을 민노당 인사들 다수가 증오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민노당식으로 경제·사회를 운영하려면 이들을 닮지 않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억수같이 비내리는 밤의 휘영청 밝은 달’은 세상 물정 모르는 자의 관념 속에는 가능하지만, 한국 같은 경제규모, 한국 같은 경제발전 단계에서는 시장을 부차적으로 활용하는 한 민노당식의 경제,사회 정책으로 노동자·민중이 원하는 ‘해방 공동체’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결국 민노당 강령은 사유재산제,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고 시장실패에 대응하기 위한 제한적 국가개입만을 인정하고 있는 우리 헌법의 정신과도, 헌법의 기초인 ‘민중의 함성’과도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결코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민노당의 약진에서 가슴 벅찬 희망을 느끼는 수많은 노동자·민중들을 실업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십상일 것이다.


2. 제로섬(zero-sum)적 사고


1) 축소지향적 대외관계


제로섬적 사고는 조선노동당과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한반도의 ‘철지난 진보’의 사고방식 기조이다. 진보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진화를 가로막는 가장 완고한 허물이다.
제로섬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다른 이해관계자가 얻는 만큼 내가 잃는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는 해외자본(특히 잉여유출에 대한 거부감)에 대한 시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 사고방식의 근저에는 ‘자본의 몫은 노동(만)이 생산한 가치를 착취한 것이며 자본 축적은 노동을 더 가혹하게 쥐어짜는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맑스레닌주의의 교조가 깔려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부자의 풍요는 빈자의 궁핍 위에서 성립되고, 원청대기업의 풍요는 하청중소기업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통해 이뤄지고,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의 풍요는 부등가교환을 통해 제3세계의 몫을 착취하고 수탈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제로섬적 사고는 북한의 자주·자립 노선에서 잘 드러나듯이,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외 관계를 축소지향적으로 가져가거나 설혹 대외 관계를 맺는다하더라도 ‘약탈적이고 대결적인 심성’으로 맺기 마련이다. 특히 격심한 피해의식은 이런 심성을 한층 강화시켜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접근하는 모든 존재에게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도록 한다.


2) 계급적 적대감 고취


제로섬적 사고는 이해관계자들을 뺏고 뺏기는 관계로,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는 관계로 바라보기에 끊임없이 집단적(민족적, 계급적) 적대감을 고취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실체도 없는 외부의 적을 향해 그 분노를 발산하도록 한다. 강령은 이렇게 말한다.


“저들의 신자유주의는 인류사회를, 정치적 권리와 기본적 생존으로부터 소외된 절대 다수 민중과 극소수의 부유한 유한계층으로 갈라놓고 있다. 한줌도 안 되는 독점자본가, 금리생활자, 투기꾼들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신자유주의는 곧 절대 다수 민중의 권리를 유린하는 야만일 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독점자본(독점이 더 효율적인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는)은 모든 자유시장경제의 적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자본의 헤게모니가 가장 강력한 나라로 꼽히는 미국도, 비록 자국 내에 국한되지만 어쨌든 거대독점 기업(스탠더드 오일, AT&T)에 대해 과감하게 분할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게다가 이 시대 모든 금리생활자는 금융자유화(신자유주의의 핵심정책으로 지목되고 있다)에 따른 전세계적 저금리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고수익을 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부동산, 주식, 채권시장 등을 기웃거린다. 한편 투기가, 투자와 구분이 좀 모호하지만, 그 사회의 公敵이 아닌 자본주의 국가는 없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정부는 재벌 및 초국적 자본과 한편 대립하고 한편 협력한다. 노동자들과도 그러하듯이…….


현실은 이러한 데도 철지난 진보는 실체도 없는 적을 향해 적대감을 고취시키고 있다. 마치 중세 유럽의 반동적 지배층이 대중들의 질병, 천재지변 등이 마을에 사는 마녀 탓이라고 둘러대서 무수히 많은 생사람을 화형시켰듯이, 철지난 진보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를 신자유주의자나 신자유주의적 정부, 미국, 부자, (독점)자본가, 금리생활자에게 돌리고 있다.


3) 소모적인 대립·갈등 양산


제로섬적 사고는 매사를 집단 역관계의 산물로 보는 사고방식과도 관련이 깊고, 매사를 당파적으로 보는 사고방식과도 관련이 깊다. 하나의 정책을 바라볼 때도 그 정책이 낳을 사회전체적인 후생을 고려하기 전에 그것이 누구에게 더 이익인지를 따져 묻도록 한다. 개방화(세계화)든 민영화든 유연화든 그것이 누구에게 더 이익인지, 누구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따져 묻도록 한다. 당연히 이러한 정책들을 미국, 재벌, 초국적자본의 음모로 보게 하고, 이들의 힘이 강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게 한다.
오건호 민주노총 전 정책부장은 2002년 4월 발전소 민영화 관련 논쟁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영화가 대두되는 이유는 민영화가 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영화를 통해 이득을 얻는 정치경제적 세력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민영화 정세는 그만큼 자본과 노동간 세력관계의 ‘불균등성’이 깊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민영화 자체가 무조건 선은 아니다. 또한 민영화를 통해 이득을 얻는 정치, 경제적 세력이 사적 탐욕을 위해서 민영화를 추진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건호의 얘기는 전적으로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 한국에서 진행되는 민영화의 본질은 이것이 아니다. 한국의 비대한 공공부문은 기본적으로 식민통치와 독재의 유산으로, 상당부분 지배집단의 사적 탐욕을 채우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또한 국가에 의한 선택과 집중의 효율이 높았던 시절(민간자본이 취약하고, 자유경쟁 시장이 미발달한 특수한 상황)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장환경의 변화에 따라 특정 상품과 서비스가 공공부문에서 공급되어야 할 이유를 상실한 상황에서는 이를 지속시키는 것은 일부 공기업 임직원들에 의한 전국민 착취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정한 시장경쟁 조건을 형성해서 시장이 민영화된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쥔다면 민영화의 최대 수혜자는 국민 대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민영화된 기업을 인수한 재벌이나 해외자본이 질 높은 경영을 한다면 역시 큰 이득을 보겠지만 그것은 국민 대중의 이익과 상충하지 않는다. 유럽의 좌파 정부들이 그 지지기반인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은 공공성의 미명 하에 공기업 임직원들에 의한 국민 착취를 전 국민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노사관계든 노정관계든 해외자본과의 관계든 대립의 측면만 과도하게 인식하게 되면 개방화(세계화), 민영화, 유연화, 시장화 과정에서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이 무수히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3. 저열한 국제감각, 자주적인 비동맹운동


필자는 社會的 연대성(공동체성) 회복을 중시하고, 사회의 진화·발전 방향성을 의식하고, 목적의식적으로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온 진보세력의 역사적 역할에 큰 기대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해방 직후 한반도 전역에서 화산처럼 분출하던 엄청난 진보에너지가 저열한 국제감각을 가지고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던 진보 지도자들에 의해 소진된 역사를 아쉬워해왔다. 남의 자본주의와 북의 사회주의의 기형적이고 흉측한 몰골을 볼 때마다 이 아쉬움은 탄식이 되어 나왔다. 그런데 민노당 강령을 보니 모처럼 들끓는 진보에너지를 또 한번 엉뚱한 방향으로 오도할 것만 같았다. 실로 민노당 강령은 병자호란, 근대화 실패, 일제강점, 분단과 전쟁, 북한의 기아사태와 참혹한 인권유린 같은 민족수난의 역사로부터 배운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외교 국방분야 강령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국방 강령은 이렇게 말한다.


“ (중략) 모든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사회 보장 제도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나,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모두 군대를 감축하고 방위비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 예산 가운데 20%나 차지하는 방위비는 5% 이하로 줄여 가고 …… 전시 작전권을 환수 …… 무기 구입처를 미국 중심에서 다른 여러 나라로 다양화한다. …… 남북한 군축 협상을 통하여 군 병력의 감축을 시도하여 남북한 각각 30만 명 규모로 군대를 감축하고 그 다음 단계적으로 더 감축해 나가 각 10만 명 규모로 만든다.”


외교 분야 강령은 이렇게 말한다.


“ …… 민족의 통일을 방해하고 자주권을 억압하는 미국을 포함한 모든 외세와의 불평등 조약 및 협정을 무효화하고…… 불평등한 한미 군사조약과 한미 행정협정을 폐기하고, 핵무기를 완전히 철거하고 미군을 철수시킬 것이다. (중략) 어떤 군사적 블록에도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며, 자주적인 비동맹운동을 지지하고 이에 적극 참여할 것이다.”


북한이 대규모 군축협상을 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인가를 떠나서, 오랫동안 중국, 일본, 러시아에 시달려온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상 먼 이웃인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폐기하고, 대규모 감군을 하고, 그 실체도 모호한 비동맹 블록에 가담하는 것이 과연 북한과 민노당이 그토록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한민족의 정치군사적 자주화에 보탬이 되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미국이 통일을 가로막고, 남북 모두에게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유도한다고 보는 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좀체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일 것이다. 물론 1945~53년의 해방공간에서처럼 한반도 전역에서 좌파 세력이 강성했을 때는 미국은 분명히 반통일 세력이었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미국이 반통일 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일 것이다.


지금 시대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엄청난 힘을 비축하여 정치경제적 비상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 원자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산업 협력, 보완의 여지도 많지만 대립, 경쟁의 여지도 많다.


또한 과거 2천년 간에 걸친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관계, 아직 밑바닥 정서에 뿌리깊게 남아있는 공격적 중화민족주의(자본주의 시장과 일당독재의 충돌로 인한 국가 분열 위기에서 필연적으로 대두되게 되어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불거진 티벳과 대만 문제에 대한 중국의 거친 태도 등으로 볼 때 중국으로부터의 정치군사적 자주권을 지키는 것은 동북아에 존재하는 모든 국민국가의 외교·안보 전략 기조가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거대한 인구와 시장과 핵을 가진 인접한 대국인 중국과 다방면에 걸쳐 우호협력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 역시 결코 뒤쳐질 수 없는 외교·안보 전략의 기조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으로 볼 때, 일체의 군사동맹으로부터 자유로운 한반도는 사실상 중국의 세력권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반도는 우리가 비동맹을 선언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도 우리의 충분한 국방력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중국과 우리가 많은 부분에서 가치를 공유할 때까지 한미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물론 세계 유일 패권국인 미국은 9·11 이후 극도의 피해의식과 압도적 경제·군사력 우위에 기초하여 일방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북한 핵을 둘러싼 북미간의 갈등으로 인해 북미간의 무력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하지만 남한과 미국의 이러한 긴장이 한미동맹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한반도의 지정학상 고대 중국의 외교전략의 기본인 ‘원교근공(遠交近攻)’(멀리 있는 나라와 손잡고 가까운 곳을 경계한다)에 입각하여, 한미동맹관계를 기본으로 하여 중국과 우호협력 관계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한미동맹관계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기 위해서라도, 남한의 자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동맹이 중국에 적대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지 않도록 조절해 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멀리는 고조선, 고구려부터 가까이는 분단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민족수난의 역사는 한반도에 존재하는 정치세력으로서 국제감각이 저열하다면 그 의도와 상관없이 민족에 커다란 폐악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기반한 반미자주노선이나 반미친중노선은 미성숙한 국제감각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4. 신자유주의에 대한 마녀사냥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노당의 적개심은 강령 곳곳에서 18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매우 깊고 크다. 강령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신자유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불굴의 의지로 투쟁해 나간다.”


강령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정확히 규정하고 있지 않다. 대신 민노당 전 정책위원장 장상환은 신자유주의를 이렇게 규정한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주의에 의한 자본운동 규제와 노동 보호에서 탈피해 자본운동을 자유롭게 하고 노동운동을 약화시켜 (경제)위기를 탈출해보자는 이념과 정책이다”


민노당 및 민노당의 가장 강력한 대중적 기반이 되고 있는 민주노총의 활동과 주장을 분석해볼 때, 민노당이 규정한 신자유주의는 노동유연화, 민영화(사유화), 세계화(개방화), 규제완화, 노동탄압, 예산축소, 사회보장제도 축소와 같은 정책과 논리를 총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방화, 민영화, 유연화, 탈규제화, 금융자유화 정책은 유럽의 집권 사민주의 정당도, 중국도, 러시아도, 미국도, 일본도 기본적으로 채택하는 정책이다. 그것은 정보화와 세계화로 인해 변화와 부침, 탄생과 소멸이 극심한 시장환경에서 경제와 사회 주체들이 역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돈이나 사람 같은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운동)에 채워진 족쇄를 해체하는 것(탈규제화, 민영화, 시장화, 개방화, 유연화로 나타남)이 경제社會的 활력을 제고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시장환경은 창의성, 유연성, 개방성, 기업가 정신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개인주의, 성과주의, 경쟁주의의 강화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유럽은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전반적으로 경제적 활력 제고를 위해 자본활동과 관련된 규제를 없애고 있다. 장상환이 볼 때는 명백히 신자유주의 정책인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西유럽 11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左派 정부가 집권하였다. 그러나 2002년 현재는 완전히 역전되어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포르투갈·아일랜드·룩셈부르크·오스트리아·노르웨이·덴마크 11개국에서 우파가 집권하고(2004년 총선에서는 스페인은 재 역전되었다) 영국, 독일, 스웨덴, 그리스는 좌파가 집권하였다. 그러나 좌파의 퇴조와 우파의 득세가 자유방임주의, 시장근본주의, 민영화, 경쟁 지상주의의 득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본운동의 자유화, 개방화, 유연화가 대세라는 것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유럽의 대표적인 집권 좌파로 알려진 토니 블레어의 영국노동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독일사회민주당이 취하는 자유화(탈규제화), 개방화, 민영화, 유연화 정책이 이를 반증한다. 이들의 정책은 한국의 철지난 진보가 본다면 영락없이 신자유주의일 것이다. 물론 신자유주의를 자유방임주의, 시장근본주의로 이해한다면 지구상에 현존하는 신자유주의 정권은 없을 것이다. 영국노동당과 독일사민당은 신자유주의를 이렇게 이해하기에 자신들은 신자유주의 정권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민노당식으로 이해하면 지구상에 문명국 중에서 신자유주의 정권이 아닌 정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개방화되고, 시장원리가 강화되면 필연적으로 극심한 변화, 불안정성, 빈부격차 등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절대적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옴으로써 빈부격차가 커진다고 해서 빈곤층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빈부격차는 커지더라도 빈곤층은 더 줄어들고 社會的 안전망은 더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렇게 되고 있다. 그래서 영국노동당과 독일사민당의 강령적 선언(1999년 6월 8일 발표한 공동선언문 ‘유럽 사민주의자들을 위해 전진하는 제3의 길’)을 보면 빈곤(층)해소라는 말은 있어도 빈부격차 해소라는 말은 없다.


한국 사회는 국가의 개입범위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사회적 갈등이 격화될 소지가 많은 나라이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부자와 빈자가 다닥다닥 붙어서 살 수밖에 없는 좁은 땅에서, 언어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강한 동질성을 가진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농경사회를 벗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평등주의 정서도 거세다. 또한 돈과 권력을 쥔 지도층 내지 파워그룹의 정통성이나 리더십도 취약하고, 널리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경제사회 체제나 국가이데올로기도 없다. 또한 민주화 투쟁과 노동투쟁 등을 통해 ‘구체제를 무너뜨린 경험’이 대중적으로 공유되어 있기에 대중의 전투성은 강하다. 따라서 ‘연대성’이나 ‘공평성’을 영·미보다 훨씬 중요시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는 제대로 기업활동을 할 수 없는 사회로 변모해 버릴 것이다.


한편 한국은 무역의존도가 70%를 넘는다. 1960년대 일찍부터 국제분업에 참가하여 대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나라로서 한국의 번영은 절대적으로 ‘국제경쟁(교역)에서의 성공에 기인한다. 최근들어 한국은 세계 제2위의 경제·기술 대국 일본과 제조업의 블랙홀로 알려진 거대 중국과 너무나 인접한 거리에서 치열한 국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 세계적인 산업대국들과 상당부분 주력 산업이 겹치고 있다. 산업분석가들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고부가가치 산업에서의 일본과의 격차는 확대되는 반면, 중국과의 격차는 축소되고, 저부가가치 산업 영역에서는 중국의 압도적 우위가 실현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많은 산업들이 중국과 일본에 협공 당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은 지적 자원, 식량자원, 에너지자원 등 각종 자원도 부족하고, 시장도 작다. 특히 식량과 에너지 수입에 연 300억불 이상의 외화를 지출해야 한다. 그렇기에 러시아, 브라질, 중국, 말레이시아처럼 유사시 모라토리엄이나 쇄국정책을 선언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한국은 국제경쟁에서의 승리가 생존과 번영의 절대적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은 ‘효율성’도 영국·미국·독일·일본·중국보다 더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국가경쟁력 강화=경제적 활력 증대와 社會的 연대성 및 통합성 증대라는 2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980년대 자유방임적 성격이 강한 영미식 신자유주의와는 많이 다른 경제사회체제를 만들어야 하고, 실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현재 27~28%로서, 유럽 국가들과 달리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고, 아마 더 높아져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지지한다. 국민연금, 의료보험(통합, 지불 상한선 없앰), 산재보험, 고용보험, 국민기초생활 보호법 등 사회안전망도 강화 추세에 있고, 물론 더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에서 생계비를 지급 받는 빈곤층도 1999년 54만명에서 2002년 1백 39만명으로 늘어났다. 노조에 대해서는 민노총 합법화, 교원노조 인정, 노조 정치 활동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등 노조친화적인 정책을 취했다. 이는 1980년대 영·미에서 취해진 정책과 명백히 다르다. 하지만 영국이나 독일이나 일본이나 중국처럼 자본운동의 자유화, 개방화, 민영화, 유연화 조치는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이는 생존과 번영의 절대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5. 20세기의 교훈


세계 최초의 자동차 법규는 186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선포한 붉은깃발법(Red Flag Act)이다. 이의 내용으로는, ① 1대의 자동차에 3인의 운전수를 태운다. 그 중 한 명은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등을 가지고 55m 앞을 달리면서 ‘자동차가 온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② 자동차의 최고속도를 6.4km/h 이하로 하고, 시가지에서는 3.2km/h로 한다. ③ 2톤 단위로 세금을 물고 시경계나 주경계를 넘을 때는 도로세를 내도록 한다. ④ 밤에는 촛불이나 가스불을 달고 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붉은깃발법 제정 계기는 자동차가 몇 건의 교통사고(보행자 사고)를 냈고, 이것을 기화로 마차업자들이 영국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벌여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법은 당시 최고 시속 40km로 달리던 자동차를 6.4km/h(빨리 걷는 속도)로 제한함으로써, 영국의 자동차 산업이 정체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1896년 이 법이 폐지되기는 했으나, 이 때는 이미 영국에 비해 산업적으로 한참 후진적이던 프랑스, 독일, 미국 등 다른 국가들의 자동차 관련 기술이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한 뒤였다. 그래서 근대 자동차 진화의 역사는 거의 프랑스, 독일, 미국이 써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붉은깃발법 제정 당시만 해도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 거의 모든 부문에서 기술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위세를 떨쳤다. 그렇지만 붉은깃발법이 영국 자동차 공업의 성장을 막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현재 대표적인 선진공업국 중 유일하게 영국 국적의 글로벌화된 자동차 기업이 없는 사정과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은 붉은깃발법에 대해 박장대소하겠지만 당시 상황에서 보면 그리 황당한 것은 아니다.
사실 개화기 조선에서도 철도나 전차가 처음 들어와서 인명이나 가축이 상하자 백성들이 철로 레일에 드러누워 철도 운행을 봉쇄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는 자동차나 기차나 전차 자체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취급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 사고가 나고 비행기 사고가 나도 문명의 이기 자체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해도 그놈의 원수 같은 차에 실려 장지로 가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동차의 폐악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의 편익을 키우고, 위험을 줄이는 쪽에서 모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 지식사회화, 민주화 등으로 표현되는 때때로 폭력적이고, 대체로 불안정하며, 뛰어난 개인, 기업, 산업, 국가들과 그렇지 않은 존재들간의 격차를 확대하는 이 흐름에 대한 민노당의 심리는 붉은깃발법을 제정하던 마차업자들과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10∼20년 지나고 보면 민노당의 강령과 정책이 지금 붉은 깃발법처럼 우스개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실로 지난 20세기가 준 교훈 중의 하나는, 민노당 사람들처럼 주관적으로는 자신들이 선하다고 생각해도, 현실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고, 시장을 모르고, 정부의 한계를 모르고, 국제정세를 모른 채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면 국가나 민족을 얼마든지 도탄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나 루마니아나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처럼 민족해방투사와 양심적 지식인으로 간주되던 사람들이 건국을 주도해도 얼마든지 생지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면(초기에는 엄청나게 기형적인 시스템이라도), 한국처럼 반역자와 기회주의자들로 여겨지던 사람들이 건국을 주도한 나라라도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세계화에 대한 피해의식, 병자호란-청일전쟁-식민화를 초래한 조선 지배층 수준의 저열한 국제감각, 정보지식기반 사회에 대한 무지, 노동가치론에 입각한 제로섬적 사고, 사물에 대한 지극히 분절적 사고, 인류가 축적한 집단주의적 실천 경험에 대한 무지, 별 근거 없는 지적 도덕적 자존심 등으로 요약되는 민노당적 사고는 일찍이 중국, 동남아, 소련과 동구, 남미, 아프리카 등에서 수많은 실패를 연출하였다. 아마 북한은 민노당적 사고 방식이 만든 가장 참혹한 실패 사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노당적 사고는 이 시대에 노동자 민중을 비롯하여 대다수 인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세계사적 보편성이 있는 ‘실패의 글로벌 스탠더드’일 것이다. 실로 민노당 강령은 ‘실패의 글로벌 스탠더드’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노당을 지지한 227만 4천명 중에 민노당의 강령을 알고 지지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필자가 확신컨대 대부분은 거의 알지도 못하고, 실제 거의 지지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이를 조속히 고치는 것이 순리이자 민노당이 유력한 정치 세력으로서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강령의 자구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인식과 목표 전반을 재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6. 에필로그 - 이미지 정치의 수혜자


필자가 민노당 강령을 꼼꼼히 살펴본 지난 2월 이후 필자는 민노당 열성지지자와 열성당원들 가운데 지인을 찾아 강령을 읽어 본 적이 있냐고 여러 차례 물어보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필자가 아는 사람 가운데에는 읽어보았다고 대답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민노당에 대한 지지 역시 이른바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처럼 오로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자기가 부여한 ‘이미지(대체로 허상이다)’에 입각하여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민노당이 17대 총선판을 ‘3보1배’나 ‘눈물’ 등 내용없는 이미지 정치가 판을 쳤다고 비난하지만, 실은 민노당이야말로 이미지 정치의 최대 수혜자일지도 모른다. 민노당에 투표한 유권자 절대다수는 민노당의 정책과 지향을 살펴보고 찍은 것이 아니라 기존 정당들의 후진적 행태에 대한 환멸과 반발심으로 찍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시도 때도 없이 황당한 이념시비를 해온 주류 언론들이 열린우리당을 주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열린우리당의 득표율에 도움이 되기 십상인 ‘민노당에 대한 이념시비’를 하지 않은 탓도 클 것이다. 이래저래 민노당의 대약진은 지난 수십년 동안의 보수의 업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민노당의 약진은 수십 년 동안 쌓여온 보수의 업보를 청산하는 힘찬 발걸음이기에 실로 건강한 측면이 있다. 민노당이 환골탈태하여 이 건강하고 거대한 에너지를 잘 인도한다면 정말로 한국 사회의 선진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한총련에 대해 이적판결을 내린 한국 법원의 시각으로 보면 민노당 강령은 한총련보다 이적성이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민노당이 그들의 이념과 정책을 평화적인 수단, 즉 사상·이념·정책의 자유경쟁을 통해 실현하려고 하는 한 사법적 단죄는 전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볼테르의 발상대로 ‘필자는 민노당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민노당이 그 생각으로 인해 탄압을 받는다면 필자는 민노당과 함께 싸울 것이다.’


필자의 짧은 경험에 비추어 보면 진보정치단체에서 강령을 다루는 사람들은 대체로 단어 하나를 가지고도 밤새도록 격론을 벌이는 열정이 있고, 각종 개념어들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한 ‘현실 정합성’이나 ‘전체적 균형감’은 없어도 ‘내적(논리적) 정합성’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른바 ‘헛똑똑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 ‘헛똑똑이들’에 질려서 현실을 잘 알고 균형감이 있는 지도자들이라 하더라도 이들 ‘헛똑똑이들’에게 강령을 통째로 맡겨버리는 일도 종종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는 필자 역시 헛똑똑이 노릇을 많이 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래서 추측컨대 민노당 강령의 지독한 시대착오성은 ‘헛똑똑이들’의 작품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민노당 강령은 대중과 깊이 교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소 과격하고 거칠게 표현되긴 했겠지만 민노당 간부들 다수의 정서와 지향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강령으로 인해 민노당이 아프게 비판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특집 - 민주노동당의 강령 분석|작성자 시대정신

<저작권자 ⓒ사회디자인연구소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