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협약과 민노총(민노총 제14탄)

유럽인 몸에 맞춰 지은 옷을 입으려고 기를 쓰는 한국

김대호 승인 2022.12.29 18:02 의견 0

국제노동기구=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는 제1차세계대전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 회의에서 채택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국제연맹의 자매기관으로서 1919년 창립되어, 1945년 유엔의 첫 번째 전문 기관(Agency)으로 되었다. 2022년 6월 현재 187개국의 정부•사용자•근로자 대표가 함께 참여하는 유일한 유엔 기구로, 양질의 일자리 창출, 일(work)에서 권리, 사회적 보호와 사회적 대화를 기반으로 일의 미래에 대한 인간 중심적 접근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ILO는 1차세계대전에 대한 성찰로부터 탄생하였기에 세계의 지속적인 평화는 사회정의 위에 서야 달성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정의의 핵심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국가 간의 근로조건의 유사성(similarity of working condition)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로조건 덤핑을 방지하여 국가 간 경쟁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한편, 시장경쟁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ILO 헌법(헌장)은 미국의 전설적 노동운동지도자이자, 당시 미국노동연맹(AFL) 의장인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가 위원장을 맡은 위원회에서 초안을 작성했는데, 벨기에, 쿠바,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폴란드, 영국, 미국 등 9개국이 참여하였다. 한국은 1991년 유엔 가입과 함께 회원국이 되었다. ILO는 창립 이후 190개의 협약과 206개의 권고를 채택했다. 핵심 협약은 아동노동금지, 고용상 차별금지,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금지 등 4개 분야 8개로 알려져 있다. 이 중 아동노동금지 협약인 제138호, 제182호와 고용상 차별금지 협약인 제100호, 제111호 등 총 4개는 김대중 정부에서 비준하였다. 하지만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금지 협약 4개는 2021년에야 3개를 비준하여, 핵심 협약 8개 중 7개를 비준한 국가가 되었다. 현재 ILO 회원국 187개국 중 146개국이 핵심 협약 8개를 모두 비준했다. 여기에는 유럽연합(EU) 27개국 전부, OECD 35개국 중 28개국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은 2개(제105호, 제111호), 중국은 4개, 미국은 6개를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우리가 작년에 비준한 제29호ㆍ87호ㆍ98호와 김대중 정부가 비준한 제100호(동등 보수 협약), 제111호(고용과 직업 차별금지 협약), 제138호(최저연령 협약)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ㆍ일본을 노동인권 후진국이라 비난하지도 않고, 각종 FTA(자유무역협정)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도 아니다. ILO 창립은 미국이 주도했지만,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투표권이 같다 보니 다수인 유럽이 주도하게 되었다. 사실 ILO협약은 유럽에 맞는 옷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유럽연합과 자유무역협정 체결 과정에서 압박 수단(비관세장벽)으로 쓰이긴 하지만 그리 강한 압박 수단은 아니다. 1996년 한국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때 제87ㆍ98호 비준을 요구받았다. 2010년 이후 발효된 한-미 FTA, 한-EU(유럽연합) FTA, 한-캐나다 FTA에서도 ‘ILO핵심협약 존중ㆍ증진ㆍ실현과 비준ㆍ준수를 위해 서로 노력하자’는 내용이 들어가 있긴 했지만, 선언적인 약속 이상이 아니었다. 유럽 노조는 수공업 장인들의 자조(상호부조)ㆍ연대ㆍ담합 조직인 길드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기업 밖에서 만들어졌고, 노조가 상점(소비조합), 병원(건강보험), 신용금고, 휴양소 등을 운영하니, 해고자나 실업자의 노조 가입이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노조의 사명은 기본적으로 단체협상으로 직무에 따른 기업 횡단적인 근로조건의 표준, 즉 노동시장 공정가격을 형성하는 것이었고, 실력행사는 한국처럼 사업장 점거나 출입문 폐쇄가 아니라, 단체로 일손을 놓고 공장 밖으로 걸어 나가는 워크아웃(walkout)이다. 그러니 사용자는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있다. 사용자의 파업에 대한 대항수단이 있으니 ‘업무개시 명령’이라는 강제노동이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발동되는 것이다. 유럽은 미국보다는 해고가 어렵지만, 한국처럼 해고를 살인이라 하지 않고, 인력사업 구조조정이 전쟁으로 되지 않는다. 비록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이라 하더라도 철밥통도 아니고, 근로조건은 오히려 민간에 비해 낮으니, 공무원에게 노동3권을 다 주는 것이다. 또한, 한국과 같은 일측촉발의 정전체제 하에 있는 나라도 없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고, 한미동맹 등 외교안보의 기본틀을 흔드는 민노총 같은 정치집단이 위세를 떨치는 나라도 없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 때 핵심 협약 4개를 비준하고, 나머지 4개를 비준하지 않은 것이다. 문정부의 ILO협약 비준은 일종의 허영이자, 그가 쏟아낸 수많은 포퓰리즘 정책의 하나다. 유노조ㆍ공공부문ㆍ대기업 근로자 등 상위 20% 이내에 드는 근로자의 권리이익을 더욱 높이면서, 근로자 대부분을 더 어렵게 만드는 정책이다. 문 정부 들어 급감한 출생아 수는 그 후과다. 출산율은 결혼, 출산, 육아를 책임질 젊은 부부들에 비치는 현세대와 미래세대 간의 기회·권리 격차 내지 자식 세대의 기회와 희망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ILO협약은 노조의 무기이자 위력적인 정부 견제 장치

지난 11월 29일 정부는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제14조(업무개시 명령)에 의거하여 시멘트 업계 운송거부자에 대해 업무개시 명령을 발동했다. 이에 화물연대는 ILO(국제노동기구)에 개입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ILO협약 제29호(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와 제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 위반이라면서. ILO는 닷새 뒤 12월 2일 고용노동부에 이 사안 관련 의견을 요청했다. 정부는 이를 통상적인 의견조회로, 2010년 이후 총 12번이나 있었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했다. 정부는 제29호 협약에는 강제노동 예외 상황으로 ‘전쟁이나 재난·재해가 발생했을 때, 인구 전체 또는 일부의 생존이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가 있다면서 화물연대 파업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고용노동부는 "집단운송거부가 국가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국민의 생명, 건강, 안전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불가피하게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한 것이라는 점을 ILO에 전달할 것"이라 하였다. 당연히 노조는 여기에 반발했는데, 이 경우 ILO가 어느 일방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ILO협약 제29호, 제87호, 제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 제105호(강제노동철폐 협약) 비준은 문재인의 대선 공약으로, 2017년 7월 발표된 100대 국정과제(63번-노동존중사회실현)의 하나였다. 문정부는 이 협약과 충돌하는 노조법, 공무원노조법 등을 개정한 후, 2021년 2월에야 비로소 3개협약(제29호, 87호, 98호)을 비준했다. 하지만 정치적 견해 표명에 대한 제재로 강제노동 부과를 금지하는 제105호는 비준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ㆍ고무 등) ①항과 충돌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ㆍ고무ㆍ선전 또는 국가변란을 선전ㆍ선동한 자”를 엄벌하는 조항 말이다. 그런 점에서 문정부는 2004년 1월에 만들어진 화물운수법 제14조와 최근 비준된 3개의 ILO협약이 충돌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처럼 보인다. ILO 협약은 비준이 되면,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게 된다. 신법 우선원칙에 따라 ILO 협약이 우선한다. 비록 정부를 강제할 수단이 ILO에는 없지만,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노조가 민주당과 합세하여 이를 강제할 힘을 가지고 있는 이상 정부에 대한 위력적인 견제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자칫 아집이나 편향이 강한 법관이 나서서, ILO협약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여 노조 손을 들어주면, 2018년 김능환 대법관이 주도한 징용배상판결 같은 후폭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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