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직 교수의 「7공화국이 온다」 논평

한국사회 습속과의 선전포고 문서

사회디자인연구소 승인 2020.01.15 18:06 | 최종 수정 2020.06.03 11:31 의견 0

2020.1.14. 출판기념토론회 발표문(프란치스코교육회관 4층) 

■이황직(숙대 기초교양대학 교수)  ?민주주의의 탄생? -왜 지금 다시 토크빌을 읽는가,  ?군자들의 행진? -유교인의 건국운동과 민주화운동,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저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입니다.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폴리스의 민주정치에 참여한 까닭에 시민과 정치공동체는 사실상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통치하며 스스로 통치당하는 방식에 동의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고대의 이 민주 체제가 결국 민주적 방식으로 (중우정치로 인해) 실패했다는 결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탐구하는 존재론의 과제와 정치공동체의 운명에 관계하는 정치학의 과제가 분리될 수 없다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다시 소환한 이는 20세기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입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그녀는 관조하는 삶이 아니라 활동하는 삶을 강조하고, 활동하는 삶 가운데에서도 생존을 위한 노동(labor)이나 유용한 사용가치를 만드는 작업(work) 대신에 정치공동체에 참여해서 토론하고 소통하는 행위(action)를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정치적인 행위능력을 상실하고 유용성만 강조하는 사회는 다양성과 차이를 잃게 되어 결과적으로 극단적인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쉽게 포획되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몸소 겪은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했다면, 김대호 소장의 정치학은 청춘을 바쳐 일궈낸 1987년 체제가 ‘황혼’으로, 곧 민주화 이후의 민주체제가 이른바 ‘x86세대’의 권력 추구장으로 전락하면서 정부, 시장, 사회 등 국가 시스템 전체가 붕괴하여 새로운 형태의 전제정, 곧 민주주의 외피를 띤 전제정으로 붕괴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대호 소장님과 오랫동안 함께 했을, 여기 모이신 지인·동지 여러분께서는 이미 잘 알고 계셨을 것이지만, 저는 논평자로서 며칠간 김대호 소장님의 책 ?7공화국이 온다?를 정독하며 뒤늦게 그런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오늘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에 대해서는 많은 분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 원인을 콕 짚어 x86 정치인이나 무능한 야당 등 특정 인물·세력의 탓으로 지적하는 진단과 담론에는 더더욱 익숙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가치, 곧 김대호 소장님의 진단과 처방이 차별적인 가치를 갖는 것은 그 분석 방법에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김대호 소장님은 오늘 한국의 위기를, 민주화 이후 30여 년, 산업화 이후 50여 년, 해방 이후 70여 년 등의 익숙한 시대 구분 수준에서 따지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정도의 시대적 분석만으로도,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으로 분절화된 대학의 학문 관행에서 놓친 많은 통찰을 이 책에 담아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성취라 할 수 있습니다. 헌정체제간 비교사회론적 분석, 그리고 한국 헌법과 노동법의 이상과 실제의 미스매치의 역사적 분석을 통한 문제점 비판 등은 그 자체로 지식대중의 눈을 뜨게 하고, 당장이라도 사회과학자들이 달려들어 연구할 새 영역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이중노동시장 형성과 구조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저자였기에 김대호 소장님의 분석은 기존 산업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충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차별적 가치는 따로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창건기쯤 확립되어 수백 년간 실행되면서 더 강화된, 그래서 제도분석에서 ‘제도’라고 부르고, 사회과학에서는 ‘문화’라고는 부르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당연시되는 삶의 관습이자 문화의 문법으로서 도덕적 규제력까지는 갖는, 바로 ‘습속’이라는 것을 모든 분석 단위의 중핵에 위치시켰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조선이라는 하드웨어의 작동 원리인 유교적 가치라는 소프트웨어가 근대화 과정에서 잠시 사라진 듯했지만, 사실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강력한 습속으로 살아남아 근대적인 정부, 시장, 사회 각 영역의 원리와 충돌하여 오늘날 한국이라는 시스템이 오작동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논제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노동과 자본, 진보와 보수, 사회주의/자본주의 등의 구체적 갈등·대결 양상은 근대적인 가치와 제도의 틀에서 해결해야 할 복잡한 문제인데, 신기하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당사자의 도덕이나 품성 문제로 환원시킵니다. 그렇게 모든 사회 문제가 도덕 문제가 되다 보니까, 정치·사회 개혁의 문제도 선거라는 전쟁에서 패배해서 사로잡힌 포로들의 부도덕 문제로, 복잡한 국제정치와 외교 사안도 양심과 비양심의 대결처럼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김대호 소장은 이 습속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세력이 말하는 그 알량한 도덕, 사실은 도덕철학 근처에도 못 가는 조폭 수준의 집단의식이고,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만큼 허술한 그 담론조차도 사실은 ‘누가 약탈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자기들만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을 소진한 조선 양반들의 자기기만의 재생으로 보았습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해법은 달랐을지라도 개신유림들도 이런 비판에는 대체로 동의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분석적 가치는 하나의 전체 사회, 즉 대통령제에서 지역 단위까지 헌정체제 전체, 재벌뿐만 아니라 노조에 이르는 산업사회 조직 전체 등에 이르는 총체적 수준에서 이러한 위선적 습속의 문제를 독립변수로 진단한 데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습속의 분석적 중요성을 강조한 데는 김대호 소장님의 독서목록 가운데 1835년과 1840년에 각각 1권과 2권이 나온, 알렉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혁명의 나라지만 혁명과 반동으로 점철된 프랑스에서 태어난 귀족이자 자유주의자인 토크빌은 9개월간의 미국 여행을 통해, 이 젊은 나라가 그렇게 역동적이면서도 안정적으로 민주주의를 작동시킬 수 있었던 가장 근원적인 힘으로, 스스로 약속하여 규약으로 만든 것 외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 시민적 자유를 가능하게 한 미국의 문화적 습속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유래하나 종교 자체는 아닌, 식민지 시대부터 공동체의 자치에 참여하면서 가슴에 새겨진 헌법 같은 ‘정치적 자유’의 관습과 자기 이익을 솔직히 추구하면서도 더 큰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이익을 존중하는 ‘바르게 이해된 자기 이익의 원리’를 각각 정치와 경제의 기본 원칙으로 하고, 문제가 생기면 국가에 의존하여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결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민사회의 원칙이 용해된 습속에 의해 제도가 설계되고 작동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민주주의를 모범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저는 김대호 소장님의 문제의식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민주화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지만 실제로 국가 시스템은 더 망가져가는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모색하던 중에 김대호 소장님은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그 해법의 단서를 찾은 듯합니다. 그 함의는 이런 것입니다. <제도만으로는 안 된다, 습속을 변화시켜야 한다.> 문제의 원인을 알았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책 ?7공화국?은 가장 정교한 한국사회 습속에 대한 전면적인 보고서이면서 동시에 습속과의 선전포고 문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적이 잘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전쟁입니다. 서재필이 독립협회와 1차만민공동회로, 독립협회 평양지부의 안창호가 공립협회와 흥사단으로, 그밖에도 시대마다 많은 선각자들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또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전통 시대의 습속과 격전을 벌였습니다.

역사가 입증하는 이 어려운 싸움에 나선, 다만 그들과 달리 정교하게 가다듬지 못했던 웅장한 플랫폼과 세밀한 정강이 담겨 있는 이 책이 광야의 예레미아의 예언이 되지 않도록, 카산드라의 예언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의 역할일 것입니다.

묻습니다. 킹핀을 찾았습니까? 그럼 누구와 함께 볼링 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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