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규:공화의 깃발을 들어야만 하는 이유

김동규(University of Cambridge PhD Candidate)

사회디자인연구소 승인 2022.12.29 18:19 | 최종 수정 2022.12.29 18:20 의견 0

1. 공화의 원리 ① - “한 명의 개인이 나라 전체보다 무겁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공화의 원리에 대한 인식이 없이 오직 민주주의 원리만으로 대한민국을 이끌려고 한다. 서양 역사를 보면, 19세기까지도 democracy 즉 민주주의는 ‘나쁜 정치체제’로 이해됐고, 그 이미지는 ‘가난한 군중(mob)의 난동’과 교활한 선동가의 포퓰리즘이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민주정을 나쁜 정치체제로 분류했다. 공화가 있는 민주만이 좋은 정치체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와 공화의 두 원리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우선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은 공화국 중의 한 종류를 말한다. 즉, 공화국인데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공화국이다.

공화국(republic, res publica)은 노예적 또는 종속적 상태에 있지 않은 ‘자유시민’(free citizen)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해 함께 만들고 운영하는 ‘모두의’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 ‘모두의’ 자발적 동의가 중요하다. 따라서, 공화국은 ‘만장일치’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떠날 자유가 보장된다. 공화국의 멤버인 ‘자유 시민’에게 전체를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할 순 없다. 전쟁터에 나가 죽는 것도, 또 사형집행 당하는 것도 다 ‘자유 시민’이 사전에 합의한 규칙에 입각한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자발적 동의’는 시민적 자유와 공화국의 요체다.

이렇게 자발적 동의에 의해 공화국은 하나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 된 공화국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입법이나 정책으로 결정해야 할 경우, 모든 사안을 만장일치로 결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만장일치가 아닌 다른 세 가지 방식으로 입법과 정책을 결정한다. 즉, 한 명에 의한 결정, 소수에 의한 결정, 다수에 의한 결정이 그 세 가지이다. 한 명에 의한 결정은 왕정(monarchy)이나 참주정(tyranny), 소수에 의한 결정은 귀족정(엘리트정: aristocracy)이나 과두정(oligarchy), 다수(majority)에 의한 결정은 민주정(democracy)이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순수 민주정이 아니라 민주공화정이다. 공화정의 원리에 따라 만장일치로 헌법을 만들고, 헌법 안에는 만장일치가 아니고서는 변경할 수 없는 기본권과 국가의 통치구조에 대한 기본 합의를 넣어둔다. 특히, 자유시민으로서 절대 침해되어서는 안되는 기본권을 못 박아둔 것이 헌법이다. 그리고는, 다수결을 통해 통치자들을 구성한 후 이들에게 입법과 정책을 맡긴다. 다수결로 선출된 통치자들이 공화의 원리를 망각하고 다수파의 힘으로 헌법의 ‘침해되어서는 안되는’ 부분을 변경하려 들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민주공화국은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51%의 국민이 다수결로 49%의 기본권과 자유시민의 인간적 존엄을 훼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4999만 국민이 99.9%의 절대적 다수결로 자유시민 1명의 기본권과 인간적 존엄을 훼손할 수는 없다. 공화주의자는 1명의 자유시민이 나라 전체보다 무겁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모두가 존중받는 자유시민들은 진정으로 단결할 수 있는 것이다.



2. 공화의 원리 ② - “혈연민족주의의 끝은 전제정이다.”

혈연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적 원리는 공화국을 위협한다. ‘혈연민족’이라는 개념과 공화국은 양립할 수 없다. 혈연민족주의는 수천년간 인류가 터득해온 정치적 원리로 시민들을 묶어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마치 큰 ‘가족’처럼 생각해서 묶어내려고 하는 이념이다. 시민들의 정치공동체에 사적인 가족의 원리를 적용하려는 이념이다. 과거 한국사회에서도 8촌 10촌 등이 한 지붕 아래서 살면서 일종의 혈족 ‘공동체’(공동체의 요체는 공유다)를 구성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확대해서 5천만명이 ‘단군의 자손들로서’ 하나의 가족을 구성해 서로 나누고 도우며 살아보자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혈연민족주의다.


대표적인 혈연민족주의 시도가 과거 일본이 추구했던 ‘가족국가’(家族國家: 카조쿠콧카)이다. 아마테라스 여신에서 나온 일가(一家)인 일본민족 전체가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고, 아마테라스 이후 한번도 대가 끊어진 적이 없다는 천황가가 종가(宗家)를 맡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가족도 아닌데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아저씨(uncle)니 아주머니(aunt)라고 부르거나 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족국가를 추구하던 일본인들 치하에 살았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인들도 ‘가족국가’를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가족국가’는 과연 실현가능한 프로젝트였을까? 서양에 despotism, despot이라는 단어가 있다. 각각 전제정 또는 폭정, 전제군주 또는 폭군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고대 희랍어에서 despot은 별다른 뜻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를 의미했다. despotism은 ‘아버지주의’ 또는 ‘아버지적 원리로 통치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아버지니 어버이는 참 좋은 말인데도, 실제로 아버지나 어버이처럼 행세하며 통치하면 전제정이나 폭정으로 전락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적 아버지 또는 자연적 어버이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이 있지만, 아무리 좋은 아버지나 어버이가 되고자 해도 5000만명에 대해 자연적 사랑이 없는 1인 통치자는 이 수많은 피통치자들에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일 수밖에 없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가족은 지옥이 될 뿐이며, 사랑이 없는 가부장은 그 식솔들에게 악마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시민들간의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운영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가족처럼 국가를 운영하게 되는 경우, 이러한 정치는 반드시 지옥과 같은 폭정으로 흘러가게 된다. 따라서, 자신을 자애로운 ‘아버지’ ‘어머니’ ‘어버이’가 되겠노라고 자처하는 정치가는 반드시 자유시민들의 정치공동체를 파괴한다.

거대한 ‘가족’ 공동체(공유가 핵심)를 추구하는 혈연민족주의는 당연히도 ‘공유’ 즉 사회주의와 친화적이다. 혈연민족주의는 정도가 심해지면서 파시즘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기타 잇키(北一輝)같은 일본 파시스트도 사회주의(“純正社會主義”)를 얘기했고, 히틀러도 민족사회주의를 얘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애’(friendship)를 논하면서 우애는 ‘함께 나눔’ 즉 공유를 그 요체로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부모와 자식간의 우애가 가장 강하고, 그 다음이 형제들간의 우애,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간의 우애가 강하다고 했다. 가족국가 프로젝트에 따라 5000만 국민을 하나의 가족으로 만든다는 것은 5000만 국민들 사이에 부모-자식간, 또는 형제간의 우애 정도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며 이는 ‘공유’로 이어진다. 하지만, 피와 생활을 나누지 않은 5000만 국민들 사이의 우애란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5000만 국민의 이름으로 국유화되거나 공유화된 것들은 소수 엘리트가 자기들끼리 향유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우애는 거짓이다.

한국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스웨덴이나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또는 고도의 복지국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 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 유럽국민들이 근대의 수많은 전쟁을 함께 겪으면서 국민들 사이에 강한 우애, 즉 전우애(戰友愛)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함께 피를 흘렸던 국민들이 소득과 재산을 나눠갖게 된 것이다. 이들 전쟁을 통해 시민권이 확대되었고, 여성들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고, 복지국가(welfare state)를 만들 수 있었다. 복지국가(welfare state)는 사실 전쟁국가(warfare state)이다. 하지만, 이렇게 ‘전쟁노력을 함께 한’ 경험이 없는 한국인들이 북유럽 수준의 복지국가를 달성하려고 부자들에게 북유럽 수준의 조세부담을 강제하려 한다면 반드시 조세저항이나 탈세, 조세회피로 이어질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복지국가’ 정책 역시 자발성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고도의 복지국가는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주변국들에 맞서 싸우는 경험을 함께 해나가면서 국민들 사이에 ‘전우애’가 형성됨에 따라 천천히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공정한 시장을 기반으로 한 ‘좋은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이다.

3. 자유시민 중심주의 - 공무원의 나라에서 상공인의 나라로!

과거의 한반도는 관료와 농민만 있었을 뿐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겨우 형성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우리는 거대한 국가관료 조직이 주도하는 권위주의 정치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에 거대한 관료조직이 자리 잡았고, 국가는 사회의 모든 부분에 개입했다. 1987년에 이른바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킨 것일뿐 거대한 국가부문은 축소시키지 못했다. 거대한 관료조직과 그 정점에 앉아있는 ‘제왕적 대통령’ 문제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정치를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기업도 정부와 유착되어 있고, 사립학교들도, 심지어 시민단체들도 정부와 유착되어 있다. 그 거대한 국가의 운영권을 놓고, 선거라는 생사가 걸린 거대한 도박판이 주기적으로 열리다보니 정치공동체 전체를 위한 자유시민들간의 차분한 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시민들의 자율적 시민사회는 위축되어 있고, 선거를 통해 차지할 엄청한 이익은 막대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상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혁명과 앙시앵레짐󰡕에서 프랑스대혁명 이후 프랑스가 한국과 비슷한 문제를 겪어왔다고 진단했다. “짐이 곧 국가”라고 외쳤던 태양왕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부르봉 절대왕정은 1789년 대혁명을 통해 붕괴되었는데, 문제는 절대왕정이 만들어 놓은 강력한 관료제가 고스란히 남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강력한 관료제를 손에 넣은 혁명정치가들은 자연스럽게 ‘1인 통치’로 빠져들었는데, 로베스삐에르는 독재자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는 강력한 관료제에 의해 비대한 국가부문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시민사회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1인통치와 군중의 반란이 교차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1789년 대혁명 당시 부르봉 관료제를 해체 내지 축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토크빌의 진단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이 대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거대한 국가부문이다. 대한민국 정치의 고질병도 프랑스와 비슷하다.

프랑스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가 설파하듯 그렇게 평등한 나라가 아니다. 홍세화와 같은 프랑스 애호가들은 종종 프랑스 대학들이 한국과 달리 평준화되어 있다고 하는데, 사실 프랑스는 서울대, 연고대와 같은 한국의 명문대가 견줄 수도 없는 엘리트 교육기관들이 있다. 프랑스의 대통령 대부분을 배출한 에꼴 폴리틱(시앙스포)과 국립행정학교(ENA), 그리고, 졸업과 함께 국립대학 교수자격을 부여하는 고등사범학교(ENS), 이공계의 최고봉으로 수많은 대기업 및 국영기업 총수를 배출하는 에꼴 폴리테크닉 등이 그런 학교들이다. 베르그송, 사르트르, 보봐르, 푸코, 메를로뽕띠 등 기라성같은 프랑스 유력 지식인들은 함께 동문수학한 고등사범 출신들이다. 국영기업 등 국가부문을 컨트롤 하고 있는 프랑스 관료들은 무료 고등교육이나 기타 무료의 혜택을 나눠주면서 민중을 포섭한다.

어느 사람이 특정 조직에서 주인인지 아닌지는 그가 ‘비용’ 문제에 관심이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주인은 혜택(benefit)뿐만 아니라 비용(cost)에도 관심이 지대하다. 하지만, 종속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혜택만 생각한다. 가족이 함께 탈 자동차를 구매하려 할 때 마냥 신이 나 있는 아이들과 달리 부모는 비용 문제로 고민이 많아지는 법이다. 다수의 영미(英美) 사람들이 ‘작은 정부’를 이야기하고 ‘예산 축소’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 사람들은 복지 혜택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인데, 그것은 그들이 종속적 위치에 있고, 사실 그 나라의 주인은 다른 사람들, 즉 국가관료들임을 의미한다.

강력한 중앙관료제, 국가의 간섭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민주화 이후의 대한민국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관료가 되거나, 국가 부문에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국가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영위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거나 공무원처럼 살고 싶어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강력한 중앙관료제와 국가의 간섭을 축소하고 시장과 시민사회를 확대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처럼 되어 평생 월급과 연금에 의존해 살아가려는 이 나라를 스스로 위험을 감수해가며 사업체를 이끌며 부자가 되기도 하고 실패를 겪기도 하는 상공인들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손발과 머리에 의존해 먹고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국가에 의존하지 않아야 국가 눈치를 보지 않는 자유로운 시민이 되고, 이러한 자유시민들이 모여 진정한 공화국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시장과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소수가 법 이외의 힘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공정’이 중요하다. 상품시장과 노동시장의 공정을 위해 법제도적인 개선과 함께 공정거래위원회같은 국가기관이 제대로 작동해야 하며, 검찰 등 다른 국가기관이 공정거래 여부를 조사하고 수사할 권한도 강화해야 한다. 공정거래는 상품뿐만 아니라 노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른바 ‘귀족노조’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자리에서 배제되거나 동일한 노동에 대해 절반도 안되는 임금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특허법과 같은 기본적인 제도가 없인 시장이 형성될 수도 없듯, 시장은 꼭 필요한 규칙이 엄격히 준수되어야 한다. 시장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축구의 오프사이드 규칙처럼 시장을 규율하는 소수의 기본적인 룰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 외는 플레이어인 상공인 기업가들과 노동자들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국가의 간섭을 약화시키고 자유시민들의 자율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바다로 나가야 한다. 북유럽의 바이킹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기에 조금만 자신의 자유과 존엄이 손상 당할 것 같으면 밖으로 이탈해버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단결시키는 것은 강압이 아닌 자발적 동의뿐이었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해외를 오가며 유동적일 수록 대한민국은 자발적 동의에 의해 운영될 것이며, 그만큼 국가의 간섭은 줄고 시민사회가 강해질 것이다. 상공인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도, 자발적 동의에 기반한 공화국을 만들기에 위해서도, 우리는 바다로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해양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4. 대한민국은 로마공화국의 길을 가야한다 - 마키아벨리

역사적으로 성공적인 공화국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서양에서 공화주의의 교과서로 간주되는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는 성공적인 공화정을 로마공화정 같은 ‘민주공화국’과 스파르타와 베네치아 같은 ‘귀족공화국’으로 나누는데, 거대한 대륙의 한쪽 끝에 붙어 있는 로마처럼 반도국가의 경우, 민주공화국 모델을 택하는 것이 더 좋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소수의 귀족이 단결해 나라를 이끄는 귀족공화국은 외교와 전쟁을 잘 해내는데, 매우 좁은 코린트해협에 의해 대륙과 단절되어 있는 스파르타는 사실상 섬나라였고, 베네치아 역시 완전한 섬나라였다. 이런 섬나라들은 외적의 침략에 강하기 때문에 거대한 시민단(市民團)을 가질 필요가 없다. 따라서, 시민단의 멤버십을 제한하고 시민단 내부적 단결에 힘쓰는 것으로 충분했다.

반면, 대륙에 붙어 있는 반도국가 로마의 경우, 스스로 시민단을 확대해나가며 대국(大國)이 되거나 아니면 대륙세력에 의해 정복당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반도 내부에 있는 평민들에게도 귀족과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거나,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의 시민들을 로마시민으로 포용하거나, 밖으로부터 이민을 받거나 하면서 로마는 시민단을 계속 확대해나갔고, 이를 통해 역사에 남을 위대한 제국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롤리(Viroli)같은 공화주의 사상가는 “좋은 공화국은 결국 제국으로 확대해나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국’은 국가가 무력으로 확대해나가는 제국주의와 다른 것으로, 자발적인 시민권확대를 통해 나라의 규모를 키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이를 ‘천하’(天下)라고 불렀다. 미합중국(美合衆國)이 200년만에 인구를 300만명에서 3억으로 확대한 것이 대표적인 ‘제국’의 사례이다.

인구 14억의 중국 가까이에 있는 대한민국 역시 ‘로마공화정’ 모델을 따라 시민단의 규모를 확대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에 따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유시민’의 수를 늘려나가야 할 것이며, 이민에 문호를 개방해야 할 것이다. 노예적이거나 종속적인 주민들이 아닌 ‘자유시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민주공화국은 억압받는 해외사람들에게 마음의 동경이 될 것이며, ‘내 마음의 조국’이 될 것이다. 이것이 조셉 나이가 말한 ‘소프트 파워’다. 제국은 ‘소프트파워’로 세상을 이끈다. 반면, 제국주의는 무력과 같은 ‘하드 파워’에 의존한다. 좋은 공화정은 어쩔 수 없이 제국이 되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대국, 즉 제국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5.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보다 한민족보다 중요하다 - 대한민국 중심주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다투고 있다. 이해관계가 상충한다. 자식인 우리는 누구편을 들어야 할 것인가?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피와 살을 물려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더 많은 것을 물려받았고, 내 삶 자체도 할아버지 보다는 아버지와 더 연결되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도 마찬가지다. 임시정부의 유산을 물려받아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긴 하지만,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이해가 상충한다면, 우리는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그리고 우리가 그 건설과 운영에 벽돌 하나라도 보탠 대한민국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임시정부 요인(要人)의 노고를 잊을 수 없지만, 만약 이 요인이 해방후 북한편에 서서 대한민국을 침공하는데 협조했다면 우리는 그를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민족 전체와 분명 관련이 있지만, 대한민국에 비해서는 그 관련의 끈이 약하다. 함께 고생해서 만들어온 대한민국보다 관계가 직접적일 수는 없다.

대한민국이 좋은 ‘민주공화국’으로 자리잡으면 반드시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싶어 대한민국을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일본사람일 수도 대만사람일 수도 베트남사람일 수도 있다. 물론, 국제정치적 상황이 열려서 북한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로마공화정 모델을 따른다면 대한민국은 시민권을 개방하는데 어려움이 적을 것이다. 북한사람들이 오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은 외부의 주민들을 구태여 합병하려고 노력하진 않는다. 따라서, 진정한 민주공화국이라면 대한민국은 ‘통일’을 인위적으로 추구해서는 안된다. 우리끼리 ‘최고의 정치체제’(best regime)를 만들어 운영하는데 집중해야 하며, 훗날 이 정치체제 안으로 북한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들어오려 할 땐 환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통일’을 국가목표로 정하고 인위적으로 추구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따라 1970년 이래 사용해왔던 통일부의 명칭도 ‘남북교류부’나 ‘남북협력부’로 변경해야 할 것이다.

1910년 강제로 병합된 이후 신채호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구겨진 민족적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만주까지 영토를 확대했던 광개토왕과 고구려를 치켜세웠다. 우리가 피, 땀, 눈물로 만들어온 대한민국은 그 고구려보다 훨씬 더 위대해질 것이며, 이미 위대하다. 최근 나온 일본 <닛케이> 연구센터 예측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2023년에 일본과 대만을 앞질러 동아시아 1위에 오르고, 이후 계속해서 1위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군사력에서도 세계 6위에 올라있고, 대중음악이나 영화, 드라마 등의 대중예술의 매력, 그리고 정치사회체제의 매력 등 ‘소프트 파워’에서도 세계적 수준에 올라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며, 이미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지난 한민족의 역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인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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