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숨은 신' 운동권 이념 청산

2024년 총선의 시대적 과제

김대호 승인 2023.08.14 11:15 | 최종 수정 2023.08.14 18:22 의견 0

한 사회의 모순부조리 뒤에는 지배적인 정신·문화 내지 통념·이념이 있다. 19세기 말 조선에 온 서양인에게 조선은 왕실부터 천민까지 미신에 빠져있는 나라였다. 유교 예법(?)에 근거한 지독한 사회적 차별과 양반·관료의 약탈과 억압이 판치는 나라였다. 서양 선교사들은 과학, 특히 만민평등의 기독교와 의학과 근대교육 등으로 미신과 차별을 쓸어내고, 견문을 확 넓혀주었다.

한 사회를 풍미하는 통념·이념을 ‘숨은 신’이라고도 한다. 포괄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론·학설 이나 가치·정책적 컨센서스도 ‘숨은 신’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를 창안한 정신적·학문적 스승(사람)도 ‘숨은 신’이라 한다. 이들은 신이라고 하는 것은 신처럼 세대가 몇 번이나 바뀌어도 영생 불멸하는 것처럼 세대 전승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이 숨어있다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크고 포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지리와 풍토의 특성 때문인지, 조선의 유습인지는 모르지만 통념·이념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중국, 일본, 유럽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징표가 문묘 종사자를 둘러싼 조선의 정치투쟁이다. 지조나 의리를 지키다가 죽어간 이미지를 가진 정몽주, 조광조, 삼학사, 최익현, 안중근, 김구에 대한 숭모다. 실리나 실용(국리민복이나 부국강병) 보다 정통, 순수, 지조, 의리, 명분에 대한 집착이 특별히 강한 나라에서는 ‘숨은 신’들을 빼놓고는 정치·사회적 모순부조리를 논할 수가 없다. 단적으로 북한이 처참한 실패국가가 된 것은 신의 반열에 올라간 김일성·김정일이 퍼뜨린 미신이나 다름없는 이론과 거짓, 차별, 폐쇄, 자뻑으로 점철된 역사관(주체사상) 때문 아닌가? 뿐만 아니라 1987년 이후 경향적으로 악화된 일자리·저성장·저출산문제도, (지역, 세대, 계층, 부문, 기업간) 불평등·불균형 문제도, 또한 일본에 대한 비이성적 증오와 북핵에 대한 비이성적 둔감도, 북한과 중국에 대한 이상하리만치 관대 또는 비굴한 태도도 '숨은 신'의 손길을 바로 보아야 이해가 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숨은 신’은 전(前)연세대 사학과 교수 김용섭(1931년~2020년)이다. ‘해전사’로 불리우는 대한민국 부정의 역사관의 비조로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다. 조우석(문화평론가)에 따르면, 해방 이후 한국의 지식사회는 일제가 심어줬던 식민사관(한반도 정체성 이론)의 족쇄를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걸 풀어낸 영웅적 해결사가 김용섭이다. 김용섭은 기념비적 저술 <조선후기농업사연구>(1970)에서 조선 후기에 자생적 근대화의 싹을 규명했다. 그걸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하는데, 일제가 심어준 식민사관의 독을 없애줄 위대한 해독제로 각광을 받았다. 한국도 일본과 같은 발전 경로를 걷고 있었으나 이게 사악한 외세 일본의 침략을 받고 왜곡됐음을 ‘과학적으로’ 규명했기 때문이다.

김용섭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인 모두가 심정적으로 믿고 싶었던 것을 김용섭이 학문의 이름으로 설명해줬으니 학계 전체가 만세 부를 경사였다. (중략) 외세가 개입하기 전 조선 후기에 농업생산력이 무럭무럭 발전하고 있었고, 사적(私的) 소유가 확립되는 중이었다는 우리가 믿고 싶었던 가설을 그가 여보란 듯이 입증했다. 토지 사유화가 지체됐기 때문에 자생적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정체성 이론’의 논리를 그런 구체적 자료와 논리로 돌파한 것이다. (중략) 내재적 발전론은 국사학을 넘어 국문학계의 사설시조, 판소리계 소설, 탈춤 등 민중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게 훗날 1980년대 운동권의 문화적 모태인 1970년대 민중문화운동 그리고 창비 그룹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으로 발전한다. (중략)전 한양대 교수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도 원조는 김용섭의 <조선후기농업사론>이다.

출처: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68&fbclid=IwAR37vdOTdyzvS5cSaVADmx2a_b_02W0r7L-XMA3Kr7f-4_qTdlTtHK4rKQA

김용섭의 학설은 구겨진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더 강하고 설득력있게 질타할 근거를 찾는 한민족에게 강력한 채찍 하나를 쥐어 줬기에, 남북한을 초월할 거족적 환호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난 10~30년 간 조선 및 남북한-일본-중국-유럽-미국의 근현대 경제사, 정치사, 사상사, 제도사, 기술사, 자연환경사 등을 주마간산한 대한민국의 웬만한 지식인은 김용섭의 주장을 (한 측면을 침소봉대한) 국뽕사관이요, 비겁하고 비루한 남탓사관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가장 큰 패악은 문명사에 눈을 감아버리면서 조선의 잔혹사, 실패사, 망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숨은 신’은 김용섭과 ‘해전사’만이 아니다.

지금 전국민이 분노하거나 한탄하는 사건, 즉 새만금 잼버리로 드러난 지자체와 정부의 무능·부실·낭비, 오송 지하차도 참사, 서이초 교사 자살은 말할 것도 없고, 일자리·저성장·저출산·불평등·불균형 문제와 인구·지방·재정·연금·건보·바이탈과(산부인과, 심장외과 등)의 위기는 윤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악화된 것도 아니다. 태풍이나 홍수처럼 한반도 풍토병도 아니다. 대체로 한 쪽을 악한 강자·가해자, 다른 한 쪽을 선한 약자·피해자라는 프레임에 입각하여 자유와 자유, 권리와 권리, 권한과 책임, 혜택과 부담 등 가치 간의 균형이 점점 무너져 왔기 때문이다. 특히 1987년 이후 운동권은 자신을 선과 정의의 체현자로 규정하고, 민주·진보·환경·노동·약자보호·역사정의 등의 이름으로, 특정한 가치를 일방적으로 지지·옹호 확대·강화하여, 가치간, 이해관계자간 무기의 대등성(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려 버렸다. 정신문화적•정치사회적 견제와 균형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증식을 멈춰야 할 세포(가치, 조직)들이 무한 증식하여, 대한민국은 말기 암 환자처럼 되었다. 김대중·노무현은 점점 심화되는 불균형을 시정해보려고 노력이라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노동·진보세력이나 운동권으로부터 신자유주의자니 변절자니 배신자니 하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문재인과 현 민주당은 미신이나 다름없는 이념을 받들고, 거기다가 포퓰리즘과 열성지지층의 이권 추구 욕망까지 결합하여 불균형과 불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런 점에서 내년 총선은 지난 36년 간 대한민국을 지배해 온 ‘숨은 신’이라는 우상들과의 싸움이다. ‘숨은 신’의 사제들이 바로 X86운동권 정치인·언론인·논객이다.

한국의 정치개혁 담론은 국가적 문제를 대체로 사람(정치지도자/정당/세대)의 문제와 제도의 문제로 단순화 내지 양분하고 갑론을박 했다. 압도적으로 사람/정당/세대의 문제로 환원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사람/정당/세대의 생각, 아니 영혼을 지배하는 '숨은 신'이다. 사람, 예컨대 X86 정치인의 문제라면 이들을 용퇴시키면 된다. 내년 총선에서 이들을 쓸어내지 못해도, 인간인 이상 생노병사를 거역할 수 없으니 10년이면 거의 해결된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이 맞딱뜨린 문제들의 본질과 구조를 뜯어보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숨은 신'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숨은 신' 이나 다름없는, 1987년 컨센서스(가치, 이념, 정책, 문화 등)를 청산해야 한다. 다시말해 청산의 본질은 낡은 사람(화석/좀비화된 운동권 정치인)이 아니라 낡은 정신, 즉 수명이 다한 1987년 컨센서스다. 2024년 총선의 시대적 과제는 대한민국의 '숨은 신' 역할을 한 X86운동권과 그 정신의 청산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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