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쟁기질을 한 혁명가들의 남은 소명

-혁명의 시대는 지성과 영성이 높은 혁명가들이 필요하다-

김대호 승인 2023.10.25 15:09 의견 0

미국의 조지 워싱턴(1732 ~ 1799)과 남미의 시몬 볼리바르(1783~1830)는 독립혁명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사심없는 직무수행으로 그 나라의 지폐 인물로 된 영웅이다. 볼리바르는 남미 6개국(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된다.

그런데 47세에 결핵으로 죽기 한 달 전, 대통령직과 총사령관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12년간 통치하면서 몇 가지 확신을 얻게 되었다...일신을 혁명에 바친 사람들은 바다에 쟁기질한 것이나 다름없다...이 나라는 필연적으로 고삐 풀린 대중의 손에 들어갔다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답잖은 폭군들 차지가 될 것이다."

볼리바르를 가장 추앙하는 나라가 베네수엘라 일 것이다. 한국의 ‘원’, 일본의 ‘엔’, 미국의 ‘달러’ 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가 베네수엘라에서는 볼리바르다. 우고 차베스 정권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인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2021년 10월, 기존 화폐 가치를 100만분의 1로 줄이는 화폐개혁(디노미네이션)을 실시했다. 불과 3년전(2018년 8월)에도 10만분의 1 디노미네이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 화폐 볼리바르 디히탈


베네수엘라 등의 모습을 보면 볼리바르의 200년 전의 예측이 별로 어긋나지 않는 것 같아서,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감하면서, 혹시 “대한민국 마저도!” 하면서 공포의 전율을 느낀다.

볼리바르는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에 감동·감화 받은 당대의 운동권 청년(혁명가)이었다. 파리 센 강변에는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파리는 볼리바르가 20대 초(1804년 전후) 몇 년을 보내면서 혁명 사상과 의지를 형성한 곳이다. 볼리바르는 남미를 미합중국처럼 만들기 위해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여 천신만고 끝에 승리하여 남미6개국을 포괄하는 그란콜롬비아를 건설하고, 초대 대통령(1819년~1830년)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과 달리, 재임 중 격렬한 정치갈등과 분열 조짐을 보고, 자신이 인생을 바쳐서 한 일이 ‘바다의 쟁기질’과 다름없다고 한탄한 것이다.

볼리바르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 니얼 퍼거슨(1964~ )은 『시빌라이제이션』(2011)에서 그 이유를 북미보다 훨씬 심한 인종적 균열, 토지 소유 집중, 민주적 자치와 통치 경험 부재, 높은 문맹률, 인간의 정신을 맑게 하는 종교의 부재 등을 제시했다.

나를 비롯하여 ‘민주화운동동지회’에 모인 운동권 성찰•진화파나 전향파 상당수는 볼리바르에게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낀다. 우리가 청춘을 바쳤던 민주화운동도 너무나 변질되고 타락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미와 비슷한 이유(민주적 자치와 통치 경험 부재, 인간의 정신을 맑게하는 종교의 부재 등)와, 중국•조선 등 유교문화권 국가가 공유하는 이유(성군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의존, 그리고 보충성 원칙 부재 등)와 대한민국만이 가지는 이유가 중첩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숱한 실패와 좌절을 성찰하면서, 민주공화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비교적 잘 작동하는 미국, 서부·중부 유럽, 일본과 민주주의가 저질화•좌익화•퇴행화되어가는 한국, 필리핀, 남미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성공(선진화) 조건도 알게 되었다.

민주공화국의 하드웨어는 횡적으로는 가치 배분 원리에 따라 국가(권력), 시장(경제), 사회(공동체)이고, 종적으로는 포괄•규율 범위에 따라 중앙, 지방, 마을(소지역), 가족·개인이다. 국가, 시장, 사회는 전문직업인인 정치인, 공무원, 기업인, 종교인, 전문가들이 움직인다. 그러면 소프트웨어는 무엇일까? 제도 단위들 간의 종적•횡적 역할 분담의 원칙인 보충성의 원칙, 공직자를 포함한 전문직업인의 소명과 윤리를 규율하는 직업윤리, 개인·가족의 정신과 행동을 규율하는 시민적 덕성이 핵심이다. 이 모두를 규율하는 이념이 바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공동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등 이념과 종교(유교, 기독교 등) 일 것이다.

한국은 하드웨어 구조 상 미국, 유럽, 일본보다 국가=중앙정부에 의한 조정, 통제를 훨씬 많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대통령도, 국회도, 지자체장, 법관도, 당대표도 전횡이 가능한 구조이다. 그런데 민주화의 이름으로 오직 대통령 권력만 제왕적이라면서 견제· 균형 장치를 늘리다보니, 나머지 소제왕(황제)들의 전횡은 더 심해졌다. 이재명이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를 하면서 벌인 범죄는 그 징표다. 자칭 민주진보는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시장을 규제로 칭칭 감고, 교육민주화의 이름으로 교사의 손발을 묶고, 법원 민주화의 이름으로 괴물 법관을 양산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민주공화국의 핵심 소프트웨어인 시민적 덕성과 직업윤리와 그 모태인 종교를 경시해버렸으니 총체적 저질화는 필연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세계 시장에서 생사를 걸고 경쟁한 기업들이 2류에서 1.5류로 올라왔다면, 철저한 국내 독과점 구조하에 있는 정치는 점점 더 많은 자원(예산과 인력 등)을 빨아들이면서도 오히려 3류에서 4류로 주저 앉았다. 설상가상으로 4류 중앙(국회 정당) 정치가 지배하는 지방정치는 4류에서 5류로 주저 앉았다. 이것이 새만금 잼버리 파행 사태가 보여준 현 주소다.

1987년 이후 민주화를 대통령의 제왕적 권능 축소와 (권한은 행사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국회의 지배 영역 확대•강화로 등치시키는 생각(컨센서스)이 점점 득세하였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는 점점 더 많은 자원과 권한을 주무르면서, 3류에서 4류로 추락하였다. 정치의 추락•타락하면, 세계사적 기적을 뒷받침한 행정과 사법 역시 2류에서 3류로 주저 앉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요컨대 1987년 이후 2023년 까지 36년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든 발전동력을 소진하고, 발전체제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1987년•운동권 컨센서스 중에서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도 있다. 반재벌 경제민주화가 대표적이다. 재벌의 주력기업들이 대부분 해외 시장에서 매출이익을 올리기에 국내에서 착취와 억압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이제널리 알려져 있다. 해외에 나가면 세계인들이 삼성, 현대 등 재벌 대기업을 통해서 한국이 대단히 발전된 나라로 인식하며 엄지척 드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3대, 4대로 세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벌 기업 및 그 협력업체 종사자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식민지 콤플렉스(열등감)이 낳은 반일 한풀이도 마찬가지다. 일본과 경쟁에서 별로 밀리지 않고, 일본을 자주 오가다 보면 과거의 열등감, 감정적 앙금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반일 민족주의나 친북주사도 시간이 흐르면 봄눈 녹듯 녹아내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점점 악화되어 일종의 가치와 제도 수술이 필용한 컨센서스가 있다. 그것이 바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철폐한다면서, 정치와 정부의 통합 조정 기능을 점점 약화시켜 일종의 무정부 상태=약육강식의 정글 상태를 만든 것이다. 또 하나는 약자 보호의 이름 하에 혹은 기본권과 사회적 표준(눈높이)을 상향시켜, 약자를 자처한 강자(공무원, 대공기업 노조원 등)들의 지대추구=약탈을 방치한 것이다. 생산력과 생산성에 비해 너무 높은 권리이익을 보장하면서 힘 약한 존재(미래세대, 민간부문, 하청중소기업, 무노조, 영세자영업 등)들의 권리이익을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위기는 압도적으로 부실한 정치에서 온다. 정치가 부실하다는 것은 정치리더십, 정당(당원과 시스템과 조직문화 등)과 열성지지층, 정치 제도(권력구조, 선거제도, 정당체제, 국회운영 등), 정치이념과 정책(콘텐츠) 등이 총체적으로 부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실한 정치는 압도적으로 민주화세력이 주도적으로 구축한 1987년 컨센서스에서 온다. 그런데 그 컨센서스는 너무나 낡았고, 이를 만들고 퍼뜨린 운동권은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하고 화석이 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들은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나라가 총체적으로 어려워지는 것이다. 1987년 컨센서스와 이를 구축한 사람이 위기의 주범이라는 얘기는 시대가 요구하는 다른 컨센서스가 힘있게 등장하지 않았고, 이를 주도적으로 구축하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구시대 청산과 새시대 개막 내지 전환은 일종의 혁명으로 사상이념과 소명의식과 투지/열정/근성 등이 필요하다. 물론 젊기만 하면, 여성이라면, 해외물 많이 먹고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으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다에 쟁기질을 한 인생이라는 자각이 있고, 그 이유를 아는 사람, 아픈만큼 성숙한 혁명가들의 역사적 역할이 필요하다. 낡고 썩은 운동권·민주주의를 재건축수준으로 리모델링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혁명의 시대는 지성과 영성이 높은 혁명가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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