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한 혁신 위원장은 왜 양화진 묘역엔 안 가나

국민의힘은 한반도 150년 근대화·문명화 혁명 세력이요, 사회적 약자의 진정한 친구요, 선진문명 세계의 이상과 양식을 공유하는 세력이라는 서사와 정체성 개발이 필요하다.

김대호 승인 2023.11.23 13:49 의견 0

지난달 23일 국민의힘은 의사이자 교수(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교실) 인요한 박사를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영어 이름은 존 올더먼 린튼인데 195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유아기는 전남 순천에서, 청소년기는 대전에서 보냈다. 부모 모두 미국인이라 미국 국적자이지만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한국 국적을 받았고 지금은 복수국적자이다.

정부·여당의 인사라면 먼지털기라도 해서 허물을 찾아 폄하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민주당조차 이를 시비하지 않는 것을 보면 민족이나 국적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를 중시하는 사회적 성숙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이는 인 교수 집안의 감동적인 스토리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요한 아버지 휴 린튼(1926~1984)은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으로 복무하고, 6·25 전쟁 때는 해군장교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할아버지 월리엄 린튼(1891~1960)은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22세 때(1912년) 한국에 와서 48년간 전주와 군산 일대에서 선교와 교육·의료 사역을 했다. 3·1운동을 해외에 홍보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1940년) 해방 이후에는 김구 선생의 주치의로 일했다. 이후 2010년 3·1운동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한국과 인요한 집안의 인연을 맺어 준 사람은 외증조부 유진 벨(1868~1925) 목사다. 그는 1895년 4월 선교사로 들어와 서울·목포·광주 등지에서 선교 사역과 교육·의료 사역을 했다. 목포의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광주의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그리고 광주 최초의 종합병원 제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을 세웠다.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입국한 아내 로티 위더스폰(1867~1901)은 입국 6년 만에 인요한의 친할머니 샬롯 벨(1899년생)을 남기고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묻혔다. 유진 벨은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묻혔다.


양화진 묘역은 의사 J.W. 헤론(1856~1890)을 안장하면서 조성되었다. 그는 1895년에 선교차 입국하여 고종의 주치의 겸 제중원 원장으로 근무하다가 1890년에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면 발병하는) 이질로 사망했다. 양화진 묘역엔 현재 선교사 145명을 포함해 총 417명이 묻혀 있다. 이들은 한반도에 기독교 복음과 더불어 자유와 평등(신분·남녀 차별 철폐) 사상과 의료·교육·위생·과학기술·산업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근대문명을 전파해 준 민족의 은인들이다. 그런데 배은망덕하게도 남북한 공히 이들을 외면해 왔다. 사실 양화진 묘역도 1970년 대 말 지하철 2호선 공사를 하면서 하마터면 헐릴 뻔 했다.


김일성 일가의 항미항일 투쟁 외에 다른 많은 근대화 노력과 독립운동을 하챦게 여기는 북한이, 이들 민족의 은인들을 무시하는 것은 이해라도 가는데, 대한민국이, 그것도 자유보수우파가 그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인요한은 고귀한 희생과 헌신으로 인류애를 실천하여 한반도에 문명의 빛을 가지고 온 은인들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인요한과 양화진 묘역은 한반도 근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 즉 문명사 중심 사관을 갖게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다. 북한과 민주·진보·좌파는 한국 근현대사를 항일독립투쟁 중심으로 재단하다 보니 동학농민운동 희생자·구한말 의병장·일제하에서 무력 투쟁을 한 의사·열사·지사는 알아도 대한민국 건국·산업화·민주화라는 세계사적 기적의 토대와 동력을 마련한 사람들, 즉 종교·사상·교육·보건의료·과학기술·산업 기업 등의 근대화를 이끈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항일 독립투쟁=도덕 중심 사관은 인간 생지옥으로 변한 북한을 외경하게 하고, 독립투사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한 대한민국을 혐오하게 한다. 북한과 남한의 완전히 엇갈린 운명을 설명하지 못한다.

항일독립투쟁사 중심의 역사서술은 역사에 대한 왜곡과 날조를 필요로 한다.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의 길로 걷고 있었단다. 자본주의-시장경제 맹아를 침소봉대하고, 재산권, 자유권, 평등권을 20세기 초까지 마구 짓이기던 조선의 극악한 정치체제에 눈을 감는다. 고종이 앞서서 나라를 팔아먹었던 엄연한 불편한 진실에 눈을 감고, 일본제국주의와 을사5적 타령만 한다. 무엇보다도 개화의 선구자들인 선교사와 독립-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에 엄청난 도움을 준 미국에 눈을 감는다. 역사를 잊는 것 보다 더 나쁜 것은 북한처럼 왜곡하고 날조하여 기억하는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선 말(비전·공약·구호 등)보다는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가 훨씬 중요하다. 감동적인 줄거리가 있는 라이프 스토리(life story)의 서사(敍事)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정치 서사의 핵심은 과거(조상·고난·업적)·현재(당면 과제)·미래(비전)를 관통하는 어떤 흐름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게 어렵기에 정치인들은 국립현충원이나 5·18민주묘역을 참배하고, 3·1운동, 4·19혁명, 5·18항쟁 등을 기념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줄기차게 설파해 온 서사와 정체성의 핵심은 대한민국은 건국•산업화 과정에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나라인데, 자신들이 4.19, 5.18, 촛불시민혁명 등 피어린 투쟁을 통해 바로 잡았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은 친일부역자와 기회주의자들의 야합으로 탄생한 나라이기에, 친일, 반공, 수구, 냉전, 기득권, 기회주의의 본산인 국민의힘은 청산•척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서사와 그 최종 결론인 정체성은 정부와 정당의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자 정치(진영·정파·계파) 통합과 국민통합의 토대이자, 정치적 권위, 자부심, 소명의식, 투지, 근성, 동지애의 근간이다. 서사와 정체성이 취약한 정당과 정부는 철근 없이 세워진 빌딩과 같다.

그래서 민주당은 조선로동당만큼이나 서사와 정체성을 핵심 무기로 삼는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그런 것에 관심이 거의 없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윤석열정부와 국민의힘이 특별히 강조해야 할 것은 정체성이고 시급히 개발할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서사다.

그 정체성의 핵심은 국민의힘이 한반도 150년 근대화·문명화 혁명 세력이요, 사회적 약자의 진정한 친구, 유럽·미국·일본 등 선진문명 세계의 이상과 양식을 공유하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개발해야 할 서사의 핵심은 개화·독립·건국·산업화 과정에서 흘린 피·땀과 민주화 과정에서 보여 준 자제와 양보의 결단이다. 5·18묘역을 방문하여 민주화운동을 칭송하고, 이준석·홍준표 등을 찾아 다니며 통합을 호소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은 국민의힘과 대한민국의 서사와 정체성을 정립하는 일이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인요한 혁신위원장이다. 그런데 왜 인요한 위원장은 양화진 묘역을 방문하지 않는가?-끝-

*이 글은 스카이 데일리에 게재된 원고를 보완함.

[김대호 칼럼] 인요한 위원장은 왜 양화진 묘역엔 안 가나 (sky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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