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칼럼)실패한 시위와 ‘복면방지법’

김병준(전 청와대 정책실장) 승인 2015.12.04 09:11 의견 0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11월 14일의 ‘민중 총궐기’ 그 목적이 무엇이었나슬로건 그대로 “박근혜 정권 퇴진, 뒤집자 재벌공화국” 바로 그것이었나아니면 ‘의료민영화’ 중지와 사회안전망 강화 등 앞으로 내건 11개 요구안을 관철하는 것이었나
그 어느 것으로 보건 시위는 실패했다. 박근혜 정부는 놀란 기미조차 없고 ‘재벌공화국’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국민 대부분은 무엇 때문에 시위했는지도 모른다. 늘 하는 시위에 그저 그러려니 하는 정도이다.
시위 이후의 모습은 더욱 한심하다. 시위의 목적이나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폭력시위와 과잉진압 논란이 세상을 덮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조계사로 피신한 민주노총 위원장이 시위의 취지와 목적을 다 가리고 있다.
실패다. 완전한 실패다. 이 정도의 논란이나 만들려고 시위를 한 건 아니지 않은가. 시위대가 요구한 11개 요구안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아니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백에 하나는 될까
나름 할 말이 있을 게다. 경찰의 과도한 ‘차벽’ 설치 등 과잉진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또 보수언론들이 그렇게 보도하니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기에는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장면이 너무 많았다. 작은 실수 하나에 대의가 무너질 수 있는 일 아니던가차라리 ‘차벽’에 갇혀 좌절하는 모습이 더 옳았다.
과거의 민주화 시위는 국민의 보편적 염원과 역사의 일반적 흐름을 담고 있었다. 이런 염원과 흐름에 역행하는 정부는 가히 공적(公敵)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번 시위와 같은 경우는 다르다. 노동개혁 반대와 의료 민영화 반대 등 우리 사회 전체가 아닌 일부의 염원과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요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정부와 각을 세우기 이전에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번 시위는 실패를 잉태하고 있었다.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설득과 설명의 대상인 국민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 국민이 알아주건 말건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이제 더는 정부와 싸우는 것이 곧 국민의 마음을 얻는 세상은 아니다. 정부를 누르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이 시대가 넘어야 할 반민주의 벽이다. 다른 조직도 아닌 노조가, 그리고 민주화를 외치는 민중조직이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실패한 시위, 숨고 피하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정부와 싸울 일은 정부와 싸우고,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할 일은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얼굴을 가릴 복면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명분과 논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부끄럽다. 어떤 문제이든, 또 어떤 집단이나 세력이든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과 방식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부끄럽다. 권위주의 시절, 즉 정부가 세상 모두였던 때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서이다.
제기된 문제를 받아들이는 정치권과 정부의 모습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큰 시위가 있었는데도 국회는 고작 폭력시위와 과잉진압 문제를 놓고 싸우고 있다. 여야 모두 시위를 불러오게 된 정치경제적 현실이나, 시위를 통해 제기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고민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일각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복면금지법’을 발의하느니 어쩌고 한다. 만들어 나쁠 것이야 있겠나. 만드는 김에 아예 모자(帽子)금지법, 화장금지법, 가발금지법, 선글라스금지법까지 만들어라. 형편이 되면 카메라를 피하지 못하게 하는 법도 만들고.
문제의 본질이 그게 아니지 않으냐. 왜 본질은 뒤로한 채 곁가지도 못 되는 일에 매달리고 있나결국 시위는 실패하고 정부와 정치권은 본질을 벗어난 싸움만 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은 늘 왜 하는지도 모르는 시위와 정치공해 속에 산다.
12월 5일 다시 한다는 시위, 이번에는 평화적으로 한단다. 시위대 그리고 정부와 정치권 모두 얼마나 달라지나 한번 지켜보자.
"이투데이" 2015년 12월1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124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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