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칼럼]청와대는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말라 - 크고 중요한 일은 반드시 청와대 밖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김병준(전 청와대 정책실장) 승인 2016.04.22 13:50 의견 0
세월호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지 30분쯤 지나 청와대 위기관리실 직원이 해경 본청 상황실에 전화를 했다. “몇 명을 구조했느냐.영상이나 사진을 보내 달라.이후 이런 전화는 계속됐고, 질문도 많고 요구도 많았다.   청와대 쪽의 질문과 요구는 어김없이 구조현장으로 전달됐다. 이 때문에 막상 사람을 구조해야 할 해경은 구조된 사람 수를 세고 보고용 사진 찍는 데 시간을 빼앗겼다.   지난 주말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세월호 특집의 한 부분이다. “아, 이게 이 나라의 청와대인가” 착 가라앉는 기분인데 사고가 일어난 지 약 1시간 반이 지났을 때 청와대가 해경에 ‘VIP(대통령)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명 피해가 한 명도 없도록 하고, 객실과 엔진실 등을 철저히 확인하라는 내용이었다.   한 명도 피해가 없도록 하라이런 지시가 없으면 사람을 안 구하나객실과 엔진실 등을 철저히 확인하라배의 구조와 현장 상황도 모르는 대통령이 자칫 상황을 꼬이게 만들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려도 되나   정작 청와대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구조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컨트롤타워로 확정하고, 그의 직급이 높건 낮건 그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 해경청장은 물론 장관까지도 지휘해 가며 사람을 구하게 하는 것 등이었다. 청와대다운 판단과 결정을 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TV를 껐다. 창가에 서서 지금의 청와대는 어떨까 생각했다.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메르스 대응도, 새누리당의 참패를 부른 ‘진실한 사람’ 건도 그렇다. 사람도 조직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더니, 그래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사람과 조직은 내리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어떡하지청년실업 문제와 산업 구조조정 문제, 그리고 북한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풀어야 할 문제는 태산이고 가야 할 길은 구만리다. 게다가 여소야대에 야다(野多)의 첩첩산중이다. 이런 수준의 판단과 결정 역량이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나암울한 기분에 이 몸도 그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집권 후반, 길은 내리막이다. 힘이 빠지는 레임덕만이 문제가 아니다. 경험으로 말하자면 판단력과 결정 역량이 떨어지는 노쇠 현상은 더 큰 문제가 된다.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열의와 자신감도, 최고 결정권자의 심리적 안정감도, 정보의 양과 질도 점점 더 못해진다는 뜻이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10월 정책기획위원장 겸 대통령정책특보로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대통령정책실장을 그만둔 지 5개월 만이었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어느 비서관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인사를 한다. 덕담인 줄 알았더니 하는 말. “사람들이 (대통령께) 말을 잘 안 합니다. 이제 말씀하실 분이 오셔서….”   정말 그랬다. 수석보좌관 회의의 분위기부터 달랐다.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뭘 그리 적는지 펜만 움직였다. 대통령 말에 대한 반응도 없었다. 대통령의 눈을 쳐다보며 한마디라도 하기 위해 애쓰던 집권 초기의 그 모습들이 아니었다.   노무현 청와대만의 문제일까아니다. 그나마 토론과 대화를 좋아하는 대통령의 청와대가 이럴진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떻겠나. 집권 말기로 갈수록 더 좋은 판단과 더 좋은 결정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앞으로도 1년 10개월, 길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과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다. 그러자면 먼저 청와대가 스스로의 판단능력과 결정능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대통령과 참모들 모두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위기관리는 매뉴얼을 잘 다듬어 두었다가 따라 하되, 크고 중요한 일은 반드시 청와대 밖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여야 정치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 역시 판단력이 낮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경험과 지혜를 가진 현자(賢者)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직접 만나면 이들 역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떨어져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부끄러울 것 없다. 대통령과 참모 개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집권 후반기의 모든 청와대가 그럴 수 있다. 오기를 부릴 일도 아니다.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다면, 이 나라가 처한 다급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동아일보. 2016.4.21) http://news.donga.com/NewsStand/3/all/20160421/77698289/1
<저작권자 ⓒ사회디자인연구소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