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의 또 다른 원인

김병준(전 청와대 정책실장) 승인 2013.12.23 15:08 의견 0

-민주세력에 대한 당부-

  * 이 글은 2013년 12월 12일 오후 5시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던 자치분권연구소(이사장 원혜영) 개소 10주년 기념식에서 행한 기조강연 원고입니다. 강의에 앞서 요지를 짧게 정리한 글입니다. 짧은 시간에 적은 글이라 표현에 다소 거친 부분이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민주주의 위기의 또 다른 원인
김 병 준(전청와대 정책실장, 사)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장)
‘민주주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라 말합니다. 청와대의 권위주의와 소통부재,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진보정당에 대한 정치적 압박, 검찰의 불공정한 수사 등을 놓고 이야기입니다.
맞습니다. 이런 일들로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바로 잡아야 할 일들이고,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동의할까요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문제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까요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지만 바로 일어나 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게 더 본질적인 위기 아닐까요민주주의의 주체이자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사람들이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는데도 가슴앓이를 하지 않는 것, 심지어 별 관심조차 없는 듯 보이는 것, 이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위기’ 아닐까요
그러면 물어보죠. 왜 그럴까요먹고 입고 자고, 또 일하고 말하는데 큰 지장이 없어서아니면 먹고 사는데 바빠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으니까요. 대통령 욕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위한다고 ‘백골단’ 풀어 두들겨 패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먹고 사느라 바쁩니다. 정치는 그저 가십거리이지 본질적인 고민은 아닙니다. 일자리 구하느라 바쁘고, 돈 빌리러 다니느라 바쁘죠.
그러나 이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국민이 가슴 아파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하나는 제1야당을 비롯한 정치권내 민주세력의 정책적 무능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겠습니다만 정당과 국회와 같은 민주적 기구의 기능적 한계입니다. 하나씩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민주세력의 정책적 무능
먼저 정치권내 민주세력의 정책적 무능입니다. 한마디로 국민의 상당수가 이들을 합리적 대안세력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야권 성향이 있는 사람들조차 이들의 능력에 고개를 갸우뚱 합니다. 선거에 져도 크게 섭섭해 하지 않습니다. 더 싫은 상대가 이겼다는 것이 기분 나쁜 정도죠.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반응에도 바로 이러한 정서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선거 다시 하자는 말이냐당신들이 하면 뭐가 달라질까........’ 이런 마음이죠.
실제로 정치권내 민주세력의 정책적 무능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모두 문제라는 뜻은 아닙니다. 집합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특히 제1야당인 민주당이 그렇습니다. 상대를 비난하고 공격할 뿐, 스스로 가지고 있는 분명한 그림은 없습니다. 변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도 부족합니다.
이를테면 하기 좋은 말로 복지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 성장 없이 복지가 됩니까복지하면 성장한다고요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는 이미 위에서 아래로도 잘 내려오지 않지만, 아래에서 위로도 잘 올라가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성장정책은 성장정책대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책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일자리 문제도 그렇습니다. 툭하면 사회적 일자리나 일자리 나누기를 이야기합니다만 그런 정도로 국민, 특히 앞날이 창창한 청년들을 설득할 수 있나요. 이들이 찾고, 또 만족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산업정책은 필요 없는 건가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동북아 정세를 보십시오. 참여정부 시절 이미 일본의 우경화와 그것이 불러 올 많은 문제들을 예상했습니다. 한반도 남쪽에서의 분쟁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대 어느 정부보다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았습니다. 제주해군 기지 또한 지역의 민원이나 환경훼손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진을 한 것이고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 고민과 고통이 들어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것, 좋습니다. 반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추진한데 대해 사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고민과 역사인식의 수준이 이를 추진한 노무현대통령의 그것 이상은 되어야 하죠. 그리고 그 보다 더 좋은 대안을 내어 놓아야 하고요. 반대하고 사과할 당시의 대안은 무엇이고, 이어도 문제까지 터진 지금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국민은 대안 없이 비판하고 반대할 수 있습니다. 국민이 대안까지 내어 놓을 의무는 없으니까요.대안 없는 비판으로도 훌륭한 국민,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대안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대안 없이 반대하고 비판할 생각이면 지금이라도 시민사회로 돌아가십시오. 당원증 내어 놓고 국회의원 배지도 떼십시오. 여야 모두에 하는 말입니다.
낮은 정책역량에 선거 때만 되면 ‘모이자’ ‘이기자’ 합니다. 이런저런 사람을 끌어 들이고 이 세력 저 세력 연대를 합니다. 정당끼리 결합하기도 하고 SNS를 통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도 합니다.그리고는 상대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때로 조롱까지 합니다. 마치 그것이 정치의 본질인양 그렇게 합니다. 정책적 무능이 정치적 무능과 선동으로까지 연결되는 겁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입니다.
SNS만 해도 그렇습니다. 생각이 잘 갖추어진 집단과 연계되면 우리사회의 정책적 담론 수준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참여민주주의의 초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주로 하는 집단과 연계되면 시끄럽기만 한 소음민주주의, 즉 Dinocracy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수렁에 빠뜨리는 겁니다.
제대로 된 정책역량을 갖추기 전에는 차라리 스스로 민주세력이라 칭하지도 말고 민주주의를 말하지도 마십시오. SNS다 뭐다 하여 이 사람 저 사람 그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그것이 오히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곁들여 말합니다. 노무현대통령 사진을 함부로 들지 마십시오. 이기는 것을 중시했지만 노무현 사전에 ‘이기고 보자’는 것은 없습니다. 옳게 바르게 이기자고 했습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생각과 합리적인 정책을 가지는 것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정치권의 주류세력과 불편한 관계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정치권내 민주세력은 어느 새 정치인 노무현이 싸웠던 그 주류세력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을 힘들게 했던 것은 야당뿐이 아니었습니다. 정책적 방향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여론 따라 갈팡질팡하던 여당도 수시로 대통령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 때마다 가슴 아파 하던 대통령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의 제1야당이 그 때의 여당과 얼마나 다를까요낮은 정책역량으로 다시 집권해 봐야 또 다시 여론에 따라 갈팡질팡하지 않을까요. 또 다시 지지도가 내려가면 대통령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정책역량을 강화하기 전에는 노무현대통령의 사진을 함부로 들지 마십시오. 그 때의 그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말입니다.
민주적 기구의 기능적 한계
오늘에 있어 의회제도는 그 자체로서 문제가 많습니다. 먼저 의회는 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정치기구로 대화와 타협의 장입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다 없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많은 문제를 처리할 수 없지요.
게다가 선거에 의해 구성되는 만큼 일반적 지식의 소유자로 구성되는 것이 상례입니다. 회의체인 만큼 빠른 결정을 할 수가 없고요. 타협해야 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들을 거쳐야 정당성을 지닌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요즘의 정책문제는 어떻습니까여러 가지 점에서 의회가 발달하던 농경시대나 초기 산업사회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 수가 많아졌습니다. 100년 전쯤을 생각해 보십시오.법안의 수가 몇 개나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셀 수 없이 많은 법안들이 상정되고 있습니다. 상정되지 못한 채 잘려 나가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전문성과 신속성을 요하는 문제도 많아졌습니다. 그 속에 내포된 신념과 이해관계의 문제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복잡해졌습니다.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수에 있어서의 대량성, 내용에 있어서의 다양성, 이해관계 구조에 있어서의 복잡성,해결에 있어서의 전문성과 신속성의 요구......... 이런 특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대화와 타협의 장이자 정치기구인 의회가 제 때 제대로 풀 수 있을까요. 의회가 의회인 이상 불가능합니다.
물론 나름 노력을 해 왔습니다. 대량성에 적응하기 위해 본회의 중심 체제를 상임위나 소위원회 중심 체제로 바꾸기도 하고,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입법보좌기구 등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나라 없이 시도해 온 변화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상임위원회와 소위원회 중심체제로 바뀌면서 특수이익집단들이 로비가 쉬워졌습니다. 의회 자체의 편향성이 강화되게 된 겁니다. 또 입법보좌기구를 강화하면서 의회가 의원 중심이 아닌 또 다른 테크노크라트 중심의 조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게들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의회는 이제 박물관으로 갈 때가 되었다.’
우리 국회도 똑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할 수가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다시 우리 정치의 후진성이 더해지고 있지요. 그 결과 할 일은 많고 역량은 안 되는 기구가 되어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싸우다, 결국 날치기나 벼락치기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밖에 없는 구도입니다.
국회가 엉망이다 보니 행정부도 시원찮은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시원찮은 시어미니 아래 며느리인들 뭘 그리 잘 하겠습니까. 또 이어 언론과 시민사회도 엉망이 되죠.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결국 보도나 토론 등이 모두 그를 따라가게 되니까요.
국회의 병이 국가의사결정 체계와 국정운영 생태계 전체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국가의사결정 능력의 저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국가경쟁력의 약화와 그로 인한 각종 갈등의 심화 등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뒤에 다시 온갖 혼란이 따르고 민주적 질서가 동요되지 않을까요. 민주주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국회가 국가경쟁력은 물론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많은 국가들이 다양한 노력을 합니다. 이를테면 합리적 지방분권을 통해 중앙정부 의회가 처리할 많은 문제를 지방정부 의회가 처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노사정위원회 등 조합주의적 성격을 지닌 기구들에게도 그 권능을 나누어주기도 합니다. 그 기능을 줄여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의회주의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이러한 노력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강화된 권력을 움켜잡고 놓지 않고 있습니다. 처리할 능력도 없고, 처리를 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리고는 날치기와 벼락치기를 계속합니다.
국회의원들도 그렇습니다. 소속 상임위 소관 법안이 아니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통과시키기 일쑤입니다. 특수 이익집단의 이해관계가 녹아 있는 법안들이 이 틈새를 비집고 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지금부터라도 국회를 국회답게 할 수 있는 안들이 나와야 되겠지요. 그런 점에서 합리적 지방분권 등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국회 스스로 지방정부와 권한과 책임을 나누고, 지역사회의 정치력을 높이는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껏 국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방분권만 해도 마지못해 일부 권한을 내어 놓거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갇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법안들을 처리하곤 했습니다. 마땅히 추진해야 할 개혁조치들이나 법안들을 처리하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지방분권과 지방자치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죠.
사실은 주요 정당 모두 지방자치에 대한 제대로 된 구상이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선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종합적인 구상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국회를 때릴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국가 기구 전체에 대한 냉소를 부르면서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겁니다.
맺으며
정치권의 민주세력에 당부합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이기고 난 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상대를 비난해서 이기겠다는 생각, 그리고 반사이익을 통해 이기겠다는 생각도 그만 둬 주십시오.
대신 국가경영의 비전을 내 놓고, 합리적 분권정책을 포함하여 정치와 국회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내 놓으십시오. 그리고 이를 가지고 사람을 모으고, 이를 가지고 국민을 설득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지더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아쉬움을 남기는 패배는 분노를 팔거나 반사이익을 통해 얻는 승리보다 백배 천배 값진 것이 됩니다.
노무현대통령을 생각 해 주었으면 합니다. 지고도 이겼습니다. 지고서 더 큰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민주세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고난 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패배를 아쉬워하고 있나요민주주의를 소리쳐 외치는데도 바닥을 때리고 있는 지지도는 어떻게 된 건가요. 심지어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했다는데도 국민들은 무덤덤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민주세력은 이에 대한 책임이 없을까요김대중대통령, 노무현대통령, 두 분의 사진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분들을 넘어서는 비전과 대안을 내어 놓으십시오.
다시 당부 드립니다. 민주주의를 무능한 사람들의 입에 붙은 ‘수사(修辭)’ 정도로 여기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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